March / April / 2025

나는 그들의 우주로 간다 - Part 1.

〈모닝캄〉은 일상의 주제에 통찰의 언어를 더한 ‘옴니버스 스토리’를 연재한다. 다국적, 다방면의 전문가들의 연재로 완성되는 ‘옴니버스 스토리’가 비행 중 그리고 비행이 끝난 후에도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열어 주기를 바란다. 그 첫 번째 작가는 정유정.

  • 정유정은 인간 본성의 이면을 탐구하는 강렬한 서사와 치밀한 플롯으로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받는 대한민국 대표 소설가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와 〈내 심장을 쏴라〉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등은 국내외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7년의 밤〉과 〈내 심장을 쏴라〉는 영화화됐으며, 그의 작품은 22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2021년부터 ‘욕망 3부작’을 집필, 2024년 〈영원한 천국〉을 출간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프롤로그

마님은 왜 돌쇠에게 쌀밥을 줬을까?

도하 공항은 뜨거운 수증기가 뒤덮고 있었다. 탑승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헉, 소리부터 튀어나왔다. 펄펄 끓는 용암이 정면에서 덮쳐오는 기분이었다. 나와 내 동행은 숨을 참고 뛰기 시작했다. 우리를 카이로행 비행기로 실어 갈 셔틀버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우리는 1등으로 버스 문을 통과했다. 덕택에 문 옆 좌석에 나란히 앉을 수도 있었다. 우리 뒤로 사람들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 나베 요리의 채소처럼 차곡차곡 쟁여졌다. 트렁크와 배낭까지 뒤엉켜 누군가 발 한번 움찔하는 날엔 줄줄이 쓰러질 지경이 됐다. 나는 흐뭇한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른 부채를 꺼냈다.

우리는 주이집트한국문화원에서 주최하는 한국 문학 주간 행사 참석 차 카이로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작가로, 동행은 출판인으로 초청을 받았다(그녀는 내 책을 내주는 출판사의 총괄 이사이자 오너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나 이 글에선 애칭으로 ‘지니’라 부르기로 하자).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직항이 없어 도하에서 환승해야 했고, 도하까지 가는 데만도 10시간 이상 걸렸다. 그런데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잔뜩 각성해서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었다.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큰 산에 막혀 몇 달째 공회전 중인 신작 작업에 이 여행이 해결책을 주리라는 근거 없는 예감.

버스가 출발했다. 동시에 한 남자가 사람들 뒤에서 우리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우리를 향해 아랍어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랍어라곤 쥐뿔도 모르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단번에 이해했다. 딱딱 끊기는 명령 투 어조, 고압적인 표정과 목소리, 검지를 깐닥이는 손짓을 조합하자 이런 문장이 완성됐다.

너네 둘 다 일어나.

남자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1차로 그 점에 주눅이 들었다. 군인 제복인지, 경찰 제복인지, 공항 직원 제복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라” 명령할 자격이 있는 자로 보였다. 지니가 공손한 영어로 물었다. 선생님,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제복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버럭 성을 내며 빨리 일어나라 재촉했을 뿐. 한 번 더 물으면 수갑이라도 채울 분위기였다. 우리는 일어났다. 제복 남자의 등 뒤에선 웬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 자리에 앉더니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지니의 자리엔 들고 있던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나는 여자를 찬찬히 훑어봤다. 진초록 히잡과 반짝이 원피스, 금덩어리와 보석으로 중무장한 손목, 손가락. 여자는 어느 아랍 귀족 가문의 마님처럼 보였다. 나는 알려주고 싶었다. 마님, 거긴 제 자립니다만.

그녀는 턱을 들고, 광대뼈 밑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려 제복 남자를 봤다. 시선의 의미는 이러했다. 저것들 좀 치워라.

제복 남자는 몸을 틀어 나와 지니를 등지고 섰다. 지니가 아까보다 덜 공손한 영어로 대화를 재시도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너른 등짝으로 우리의 시야를 차단한 채 꿈쩍하지 않았다. 우리가 마님 옆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팔을 뻗어 결계까지 쳤다. 지니는 황당해하는 눈으로 나를 봤다. 우리 지금 눈 뜨고 코 베인 거 같은데. 그런 것 같았다. 두 남녀의 정체는 마님과 돌쇠 커플이겠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이해됐다. 저 아랍 돌쇠는 마님과 마님의 핸드백을 모시고자 만만해 보이는 외국인의 자리를 강탈한 것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헛웃음이 터졌다. 열은 받는데 어이없어 웃음이 나고, 웃은 마당에 다시 정색해서 따지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실은 따질 시간도 없었다. 버스가 이미 비행기 앞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 문이 열리자 돌쇠는 팔로 차단 봉을 만들어 출구로 향하는 이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마님은 레드카펫을 걷듯 사뿐사뿐 하차하셨다.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마님과 다시 만났다. 비상구 옆 좌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핸드백은 마님의 무릎에 놓여 있고 돌쇠는 보이지 않았다.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마님께선 왜 이코노미에 계실까? 퍼스트나 비즈니스 클래스가 아니고? 혹시 전용 제트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다급하게 구한 티켓이 이코노미였을까? 저 마님 눈엔 어리바리 자리를 빼앗긴 우리가 뭐로 보였을까? 그나저나 돌쇠는 어디로 갔을까? 나와 지니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기나긴 토론을 해봤다. 카이로에 도착할 즈음 내린 결론은 이랬다. 어쨌거나….

오늘 밤 마님께선 돌쇠에게 쌀밥을 고봉으로 주실 거야.


카이로

동굴 속의 구원자

여행의 즐거움은 동반자와의 관계에 달려 있다. 제아무리 멋진 장소, 멋진 계획도 동행과의 합이 틀어지면 악몽이 된다. 오랜 친구끼리 여행을 떠났다가 진절머리를 내며 돌아오는 경우도 왕왕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지니는 내게 최고의 동반자다. 지니에게도 내가 최선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우선 그녀와 나는 일상 패턴, 취향, 체력 조건이 비슷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는 점에서, 식성이 까다롭지 않다는 점에서, 사소한 주제로 장시간 수다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과격한 ‘놀이’에 열광한다는 점에서, 영하 40℃에서 영상 40℃까지, 극단의 기후를 소화해 낸다는 점에서, 눈보라나 비바람에 기죽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제각각 주특기도 하나씩 있다. 나는 힘쓰는 일을 잘한다. 지니는 영어와 독일어가 가능하다. 세상 어디에 가든 언어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얘기다. 독심술도 가능해서 눈만 마주쳐도 뭔 말인지 재깍 알아차린다. 이 무언 소통의 경지는 아마도 지난 10여 년간 함께한 해외 문학 행사나 취재 여행의 결과물일 것이다. 여행 목적지가 정해지면, 꼼꼼한 지니가 계획을 세우고 세부 일정을 짠다. 덜렁쇠인 나는 닥치고 따르는 매우 어려운 일을 맡고 있다. 카이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짐 풀자마자 호텔을 나서면서도 지니에게 “어딜 가느냐” 묻지 않았다. “어디로 가겠느냐” 물은 이는 공항에 마중 나온 한국문화원의 현지인 직원 A였다. 한국어가 가능해 일일 가이드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늦은 오후라 한 곳 정도만 갈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지니의 선택은 피라미드도 박물관도 아니었다. 칸 엘칼릴리 시장에 있다는 ‘마푸즈’ 카페였다.

우리를 태운 차는 복잡한 도로를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대형 트레일러와 덤프트럭과 버스와 승용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와 말수레가 우리 옆을 스쳐갔다. 부연 대기가 도시의 하늘을 에워싸고, 사람들은 오래된 건물들 앞을 활기찬 걸음으로 오갔다. 현대의 여름과 중세의 가을이 뒤섞인 풍경이었다. 어쩐지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친숙함과 낯섦의 간극에서 온 혼란이었을 것이다. 중세의 가을이 낯설었다면, 현대의 여름은 1980년대 초반의 한국을 보는 것 같았다.

차가 시장 입구에서 멈췄다. A는 두 가지 사항을 주지시켰다. 소매치기가 있으니 소지품을 잘 간수하라. 귀를 닫으라. 가게 점원의 달달한 꼬임에 넘어가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시장 안에 ‘조르디’라는 정찰제 상가가 따로 있다고 했다. 기념품이 필요하면 그곳에서 사라고 했다. 팔랑귀로 동네에서 명성이 자자한 내겐 너무나도 어려운 주문이었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며 A는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칸 엘칼릴리 중 ‘칼릴리’는 ‘왕자의 여관’이라는 뜻으로, 14세기경 이슬람 지구에 세워진 전통시장이었다.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처럼 이집트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고,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이집트 만물상’이었다. 그 명성을 입구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금은방, 보석상은 물론이고 향신료, 향초, 그릇, 카펫,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기가 질릴 만큼 많은 물건과 북적대는 인파와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물과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 됐다. 그 틈에도 팔랑귀는 초당 두 번꼴로 팔랑거렸다. 홀린 듯이 물건값을 물어보면 지니가 나직하게 속삭이고는 했다. 조르디….

지니의 속삭임을 약 30번쯤이나 들었을까? 우리는 낙타 간판이 있는 건물에 다다랐다. 2층에 조르디 매장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리버풀 FC의 간판스타이자 이집트 국민의 자부심, 모하메드 살라의 저지를 샀다. 그 나라 스포츠 스타의 유니폼은 여행지에서 습관처럼 사 오는 기념품이었다. 내가 그 나라의 인상을 간직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내 또래의 한국인이 IMF 시절의 박찬호를 기억하듯.

조르디에서 마푸즈 카페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랍연맹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집트의 위대한 소설가 나기브 마푸즈의 단골 카페라 했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실제 집필은 ‘엘피샤위’라는 카페에서 했고 마푸즈에선 주로 노닥거리기만 했다고 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마푸즈 문학의 진정한 태 자리는 이곳 마푸즈 카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닥거리기는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놀이고, 놀이는 인간 상상력의 모체이므로.

마푸즈의 첫인상은 카페보다는 전통 레스토랑에 가까웠다. 고풍스러운 벽 장식과 기하학무늬가 강렬한 대리석 바닥, 금장 테이블에 금장 재떨이(A가 말하기를, 술을 마시지 않는 이집트에선 국민 대부분이 흡연자란다), 아랍문자가 새겨진 쿠션과 흰 덮개를 늘어뜨린 벨벳 의자. 지니가 이집트 전통 빵인 피타브레드와 터키시 커피를 시켰다. 그사이 나는 카페 한구석에 구두 통을 놓고 앉아 있는 노인에게 눈이 팔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노인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A의 통역 없이도 알아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구두 닦으실라우?

흙먼지가 올라앉은 내 워커를 내려다봤다. 인조가죽이라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치 않았지만 예스, 라고 답했다. 사실은 기억에서 불려 나온 열한 살 소녀가 한 대답이었다.

나는 전라도의 한 소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군청 공무원이었는데, 가끔 점심시간에 전화를 걸어 내게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갑자기 비상이 걸렸으니 갈아입을 속옷을 가져오라든가 책상에 놔둔 서류봉투를 가져오라든가. 소위 땡잡은 날이었다. 아버지가 부르는 곳은 군청 사무실이 아니었다. 군청 근처에 있는 ‘홍다방’이었다. 그곳에 가면 나는 늘 환대를 받았다. 고운 한복 차림의 홍 마담은 바삭바삭한 토스트와 따뜻한 코코아차를 만들어줬다. 어디 그뿐일까?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속삭거리곤 했다.

따님이 참 귀엽게 생겼어요.

이 세상에 유전자적 표현형에 대한 칭찬만큼이나 기분 좋은 게 또 있을까? 머리털이 난 이래 내게 귀엽다고 말해준 이는 홍다방 홍 마담 말고는 없었다. 해봐야 입만 아픈 얘기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홍 마담이 아버지 곁에 딱 붙어 팔짱을 끼었다고 일러바치지 않았다. 그랬다간 두 번 다시 홍다방에 갈 수 없을 테니까.

토스트를 다 먹을 즈음이면 구두를 닦는 아저씨가 다방에 등장하고는 했다. 아저씨가 아버지의 구두를 가져가면 나는 잽싸게 뒤를 따라갔다. 다방 입구에 있는 작은 구둣방 앞에 쪼그려 앉아 아버지의 헌 구두가 번쩍번쩍한 새 구두로 탈바꿈하는 걸 지켜봤다. 먼지를 털고, 구두약을 바르고, 불 붙인 신문지로 구두코를 지져서 불광을 내고. 이 과정을 몇 번이나 지켜본 끝에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구두를 닦아두면 그만한 보상도 따라올 테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행동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헌 구두를 마당 창고로 끌고 들어가서, 구두약을 바르고, 신문지 조각에 불을 붙여서….

그날 나는 창고를 홀랑 태워먹을 뻔했다.

카이로에 온 지 사흘이 지났다. 공식 일정인 문학 행사는 모두 끝났다. 우리에겐 하루의 자유 시간이 남았다. 오전은 기자의 피라미드를 돌아다니며 보냈다. 점심 무렵엔 근처에 있는 메리어트 메나 하우스 호텔 정원에 가 있었다. 이 정원은 피라미드가 보이는 걸로 유명한데,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1943년 이 호텔에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회담이 열렸다. 장제스 총통이 의제로 올려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카이로선언 기념비가 처칠 가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기념비의 선언 문구를 읽었다.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경례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100년도 안 되는 시간에 식민지에서 선진국 대열로 뛰어오른 내 나라에. 이 감정을 한 단어로 줄이면 ‘국뽕’ 정도가 될까?

호텔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지니가 다음 일정에 대해 말을 꺼냈다. 선택하라 했다. 본래 계획대로 카이로박물관에 갈지, 한국문화원 주재원이 추천한 모카탐 마을(‘만시야르 나세르’)의 성 시몬 수도원에 갈지. 시간상, 둘 다 가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후자에 한 표 던졌다. 지니도 후자에. 만장일치였다.

모카탐 마을은 ‘쓰레기 마을’이라 불리는 카이로 외곽 동네였다. 주민들은 쓰레기 수거와 재활용품을 분리하는 일로 먹고산다고 했다. 외부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택시나 우버는 마을에 들어가는 걸 꺼린다 했다. 어찌어찌 가더라도 돌아올 교통편이 문제였다. 주재원 말로는, 외국인이 이 마을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지니는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우버를 잡았다. 카이로의 여타 택시와는 달리 에어컨이 시원스레 작동되고 내부도 깔끔했다. 기사는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중년 남자로 자신을 모하메드라 소개했다. 첫날 산 저지의 주인, 모하메드 살라와 이름이 같아 나 혼자 친밀감을 느꼈다. ‘모하메드 2’라는 의미에서 그를 ‘투’라고 부르기로 했다. 고맙게도 투는 영어가 가능해서 지니와 수월하게 의사소통이 됐다. 더 고맙게도 한국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덕택에 긴장을 풀고 이동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었다.

카이로 남동쪽을 향해 1시간 정도나 달렸을까? 차는 모카탐 마을로 들어섰다. 차창을 닫고 있는데도 악취가 급류처럼 쓸려 들어왔다. 난생처음 맡아보는 무지막지한 냄새였다. 차는 쓰레기가 언덕을 이룬 입구를 지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통과했다. 나는 입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열어 둔 귀로는 투가 알려주는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모카탐은 아랍어로 ‘잘려나가다’라는 뜻이었다. 본시 돌산이었으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만들려고 채석장으로 쓰다 보니 산이 잘려나가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정부는 이곳 절벽 밑에 쓰레기 수집인의 정착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했고, 그것이 마을이 시작된 유래였다. 카이로 시민은 이들을 자발린이라고 부르는데, ‘쓰레기 줍는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현재 모카탐 마을에 정착한 이는 약 3만여 명, 그들 대부분이 기관지 질환을 앓고 있었다. 90%가 이슬람교도인 이 나라에서 소수의 콥트 교도이기도 했다. 인류 역사가 말하듯, 다수에 반하는 소수집단에는 박해의 서사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서사가 참혹해질수록 그들의 신앙과 신념은 더욱 강화됐을 것이고. 그들은 이집션들이 꺼리는 일을 맡으면서 차별과 탄압을 견뎌냈다고 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차창 밖을 내다봤다. 마을 풍경이 차체와 함께 흔들리며 스쳐갔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 허름한 집 창문마다 걸려 있는 콥트십자가, 빵 가게와 식료품 가게, 철물점, 상가 뒤편에는 높다랗고 창문이 없는 건물들이 서 있었다. 쓰레기 분류 작업은 아이와 여자가 맡는다고 했다. 카이로 시내에서 쓰레기를 수거해 오는 건 전통적으로 남자가 하는 일이었다.

마을 길은 1.5km쯤에서 끝났다. 가파른 경사로와 함께 십계명, 예수, 마리아 등이 새겨진 암벽이 나타났다. 더 올라가자 암벽 밑에 자리 잡은 성 시몬 수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는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본래는 우리를 내려주고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계획을 바꿨다. 관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우리를 다시 카이로 시내에 데려다주기로. 조금 지체하더라도 빈 차로 나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다. 원한다면 가이드 역할도 해주겠노라 했다. 가이드 비용이나 팁은 따로 요구하지 않았다. 귀환이 문제였던 우리에겐 그저 고마운 제의였다.

성 시몬 수도원의 예배당인 태너스 홀 입구엔 돌로 만든 아치 구조물이 있었다. 나는 아치 위에 새겨진 문구를 입속말로 읽어봤다.

“Amen come Lord Jesus”

투에 따르면, 초기 콥트 교도가 박해를 받아 죽음을 맞이할 때 부르짖던 문구였다. 아치 안으로 들어서자 예배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계단식 강의실처럼, 위에서 아래로 바위벽을 파 내려간 형태였고,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다. 중동에서 가장 큰 동굴 교회 중 하나로 2만 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를 증명하듯,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바위 천장 아래로 의자들이 끝도 없이 도열해 있었다.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었을까? 한 사람 한 사람, 1cm, 2cm, 손으로 바위를 파내가며 만들었을 텐데. 때로 암벽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을 텐데.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살갗 밑에서 자잘한 소름이 밀고 올라왔다. 신앙과 신념의 조합은 못 해낼 일이 없는 인류 최강의 무기구나, 싶어서.

우리는 긴 계단을 내려갔다. 콥트 성인인 시몬 태너의 생애를 새겨 넣은 벽 장식을 들여다보면서 한 칸씩, 서서히. 맨 아래쪽 연단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오르간 연주가 들려오고 있었다. 단상 안쪽에 놓인 오르간 같은데 서 있는 위치상 연주자도, 연주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음악이었다. 천상에서 울리는 듯 장엄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였다. 음 하나하나가 신과 감응하는 것처럼 성스러운 소리였다.

어쩐지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몸을 돌리고 섰다. 높다란 동굴 천장 너머로 저녁 하늘이 붉게 타고 있었다. 노을은 예배당에 도열한 의자들 위로 빛의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밟고 금방이라도 신이 걸어 내려올 것 같았다. 등 뒤에서 울리는 오르간 연주는 신을 맞이하는 구원의 노래로 들렸다.

그때 내 이마를 쓸고 간 서늘한 기운은 바람이었을까, 아니면 빛과 소리가 내 몸에 새긴 환각이었을까? 잠시 멍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했던 생각도 기억난다. 만약 30초 후에 전 인류가 종말을 맞는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내 집 의자에 앉아 저 빛의 길과 오르간 연주를 떠올리지 않을까?

  • 다음 이야기는 다음 호 Part 2에서 이어집니다.
  • 글. 정유정
  • 일러스트레이션. 권민호 & Hw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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