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 기지, 남영동
서울의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는 남영동을 걷는다. 골목 이곳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골목 저곳에는 새로운 미식 탐험지가 가득하다.
지금은 폐쇄된 미군기지 옆 울타리를 따라 걷다 남영동에 다다르면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길을 마주할 수 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그룹 사옥을 비롯한 각종 고층 건물이 즐비한 용산 일대와 달리 남영동은 서울의 과거를 온전히 간직한 채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리즈에 출연한 셰프들의 식당이 다수 위치한 미식 거점으로 소문나며 과거와 현재의 맛과 멋이 어우러진 ‘퓨전 기지’ 남영동. 이곳에서 출발해 언제나 서울의 중심이자 첫인상이 돼왔던 서울역까지, 어제와 오늘의 서울을 담은 거리들을 도보로 걸어본다.
굴다리 동네
굴다리가 보인다. 누군가는 이 동네 일대를 굴다리로 떠올리기도 한다. 지상으로 철도가 다니기 위해 도로 위쪽으로 세워진 굴다리 구조는 서울 도심에서 보기 드문 풍경으로, 조금은 낯선 서울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과 함께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영동의 두 굴다리 가운데 특히 서울역과 가까운 숙대입구역 굴다리 근처에는 굴다리매점, 굴다리국수, 굴다리포차와 같이 ‘굴다리’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노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서울 ‘남’쪽의 군‘영’, 남영동과 미군기지
남영동은 용산미군기지와 맞닿은 담장으로 구획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연병정(練兵町)’이라 불리며 인근에 일본인이 다수 거주했다. 그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일본군의 가족이나 군무원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이 일부 남아 있어 골목골목에는 지나온 시간의 흔적이 가득하다. 일본 군영을 이어받은 미군부대의 영향으로 개발이 제한돼 자연스레 옛집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네 중심으로 들어서면 지나온 세월을 함께한 노포와 최근 생긴 가게들이 골목에 조화로이 자리 잡고 있다. 쉬이 가시지 않는 미식 열풍의 주역,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을 기준으로 가장 주목받는 동네는 남영동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실제로 시즌 1에 나온 영탉 오준탁 셰프의 ‘남영탉’, 간귀 현상욱 셰프의 ‘키보 에다마메’가 보이는 남영동 중심가를 기준으로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의 ‘비아 톨레도 파스타바’, 키친 갱스터 박지영 셰프의 ‘나우 남영’, 4.8.100 고석현 셰프의 ‘남영동양문’ 본점 등이 모두 도보로 방문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다. 서울의 새로운 맛이 궁금한 이들에게 이제 남영동은 미군기지가 아닌 미식의 기지다. 미군기지 근처의 헤리티지를 그대로 간직한 퓨전 음식, 스테이크와 부대찌개 가게는 남영동의 변치 않는 상징이다. ‘50년 전통’을 노란 간판에 내건 ‘털보집’은 스테이크 거리의 시작을 알린다. 남영동의 스테이크는 흔히 알고 있는 양식 스테이크와는 조금 다른데, 인접한 미군기지에서 반출된 소고기와 함께 ‘미제’ 소시지와 베이컨 등을 구워서 먹던 음식이 한국식으로 변형됐다고 한다. 주한미군 병사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남영동의 스테이크는 각종 소시지, 햄, 소고기와 함께 감자, 가지, 피망, 버섯이 불판에 올려져 나온다. 한국식 스테이크답게 부추무침과 토마토케첩을 뿌린 양배추샐러드를 곁들여 먹는다. 사골 베이스의 국물에 ‘Made in USA’ 소시지와 햄이 들어간 털보집의 부대전골은 흔히 알던 자극적인 부대찌개와는 다르게 색다른 풍미를 제공한다.


Since 1922, 남영아케이드
스테이크 거리를 지나 걸음을 옮겨 대로변 골목길에 서면 ‘남영아케이드’라는 간판 아래 입구가 보인다. 따라 들어가면 무려 100년이 넘은 아케이드형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1922년 당시 근처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위한 주택지에 건설한 공설시장이었던 곳으로, 콘크리트 외벽과 대비를 이루는 높은 목조 지붕이 성당식 채광 구조를 만나 독특한 외형을 완성한다. ‘아케이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내부와 외부를 잇는 복도식 구조로 이뤄진 이곳에서는 실제로 쌀과 달걀 등을 파는 상점들이 2010년대까지 운영됐고, 현재는 세 곳의 카페와 음식점이 영업 중이다. 건물만큼이나 내공이 쌓인 이곳 업소들은 음식과 함께 흘러온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의 흐름을 고요히 내뿜는다.
로스터리 카페 ‘데일리루틴’에서는 높은 층고와 목재가 주는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의 맛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소량으로 로스팅한 원두를 섬세하게 내린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사색이 가능한 공간. 말 그대로 데일리 루틴처럼 이곳에 들르는 동네 주민들과 멀리서 찾아온 여행객 모두를 만날 수 있는 카페의 정석과도 같은 곳이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에서 영탉으로 이름을 알린 오준탁 셰프의 또 다른 공간 ‘탄막’도 이곳에 위치한다. 숯을 사용한 요리와 함께 전통주를 페어링할 수 있는 요리 주점이다. 절인 무를 곁들인 고등어회부터 타이식 터치가 가미된 등갈비찜까지 전통주와 조합할 수 있는 신선한 제안들로 가득하다.
‘유용욱바베큐연구소’는 유용욱 소장의 고기 요리에 대한 깊은 연구와 실험을 바탕으로 특별한 바비큐 경험을 제공한다. 다양한 고기 부위에 맞는 조리법에 한국식 장과 같은 K-터치를 가미해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창적인 코리안 바비큐를 선보인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곳으로 한끼 식사 이상의 경험을 만들 수 있다.



문화역서울284
여행을 마무리하며 그동안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서울역을 목적지 삼아보면 어떨까? 문화역서울284는 옛 경성역 건물을 초기 모습을 살려 복원한 복합문화공간이다. 1900년에 남대문정차장으로 지어진 공간이 경성역, 서울역 이라는 이름을 거쳐 2011년 새롭게 문을 열었다. 회화, 설치, 공연 등 다양한 예술 전시가 열리는 이곳에서는 여타 화이트큐브로 대표되는 전시 공간과는 달리 옛 서울역 모습 그대로가 전시의 배경이 된다.
공간 한쪽에는 기차를 타지 않아도 전국을 만날 수 있는 카페 ‘연남방앗간’이 마련돼 전시 관람이 아니더라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곳은 로컬 브랜드의 상품과 크리에이터들을 소개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동네 방앗간과도 같은 곳이다. 방앗간이라는 이름처럼 참기름과 깨, 곡물을 재해석한 음료 등 한국의 전통 메뉴에도 충실하다.

- 글. 노소영
- 사진. 최용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