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학, 어울림
예로부터 한국인에게는 ‘함께 어울려 살며 즐기는’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희로애락을 나누고, 그렇게 한 판, 한 마당이 돼 각자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융합하고 화합해 함께 흥을 돋우어 창의적인 조화를 발산하는 것. 그 어울림의 정서가 오롯이 녹아 있는 문화적 결정체가 바로 한국의 식문화와 놀이 문화다. 그것은 전통에서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지니고 있으며 미래에도 이어질 귀한 한국의 가치이다.
- Gradation K는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과 멋이 깃든 전통 미학을 오늘의 시선에서 탐구하는 칼럼이다. 그 첫 번째 주제는 서로 다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완성되는 ‘어울림’의 미학이다.
한식, 식탁 위의 어울림
2005년,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음식과 건강 칼럼니스트 케이트 브래츠키어가 〈이팅 코리안〉의 저자인 세실리아 해진 리에게 전화로 한국 음식 먹는 방법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세실리아는 “모든 반찬은 공용입니다”라고 말했다. 케이트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물었더니, 세실리아는 한식 음식점에 가면 밥 한 공기와 국 한 대접만 개인용이고 다른 음식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한국인 대부분은 밥과 국, 반찬을 입에 넣고 함께 씹으면서 느끼는 맛을 진짜 한식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인식이 생겨났을까?
한국인의 주식은 곡물로 지은 밥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댄 주라프스키는 곡물로 지은 밥을 주식으로 먹는 지역의 사람들은 ‘전분 음식’과 ‘비전분 음식’을 입안에서 섞어 먹는 습관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인은 여기에 국을 더 보태 ‘밥+국+반찬’이 함께 입안에서 어울리는 맛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식사 때 국을 빠트리지 않는 이유는 100여 년 전 순 멥쌀만 넣은 쌀밥이 아닌 ‘쌀과 보리’ 혹은 ‘쌀과 잡곡’을 섞어 지은 밥을 주로 먹었기 때문이다.
부드럽지 않은 곡물로 지은 밥을 효과적으로 먹기 위해 국과 반찬을 함께 입안에 넣고 먹는 식사법이 생겨났고, 한국인은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고 생각한다. 전분 덩어리인 밥을 오랫동안 씹으면 침 속에 들어 있는 효소인 아밀라아제가 활성화된다. 특히 아밀라아제의 프티알린이 밥 속 전분을 가수분해해 당으로 바꿔준다. 밥을 씹으면 단맛이 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국과 반찬을 보태면 입안에는 아미노산의 구수한 맛이 가득해진다. 이 맛이 바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한국의 맛’이다.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도 좋아하는 한국의 맛이 있다. 음식 비평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 기자 조나단 골드는 2013년 10월 10일 옛 트위터(엑스)에 “···그 단순함에 약간은 마음이 휘어잡히는 것 같다. 그리고 너무 좋다”라는 글을 올렸다. 조나단이 언급한 이 음식은 바로 지금 여러분 앞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비빔밥이다. 고추장은 비빔밥 재료들의 어울림을 극대화해 주는 양념이다.
한국인은 반찬이 마땅치 않을 때나 입맛이 없을 때, 또는 빨리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 식탁 위에 올려진 밥과 반찬을 섞어 비빔밥을 만든다. 많은 한국인이 비빔밥을 먹을 때 콩나물국이나 선짓국을 곁들인다. 그래야 ‘밥+반찬+국’의 ‘핵융합’이 입안에서 완성된다. ‘밥+국’이 아예 한 그릇에 담긴 국밥은 또 다른 어울림의 음식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곰탕, 설렁탕, 순댓국, 육개장, 콩나물국밥 등을 즐겨 먹는다.
또 국이 나오면 밥을 말아서 먹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게 먹으면 ‘밥+국’에서 우러나오는 아미노산의 맛을 만끽할 수 있다. 한국인은 국밥을 먹을 때도 김치나 반찬을 반드시 함께 먹는다. 그래야 ‘밥+국+반찬’의 조화가 이뤄지며 한국의 맛이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눈 후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함께 식사’를 하면 더욱 친밀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어에는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를 부르는 말이 따로 있다. 바로 ‘식구’다. 식구는 한국제 한자어인 ‘食口(식구)’에서 나온 단어다. 좁은 의미의 식구는 한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의 식구는 같은 공동체에 속해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한국인은 잘 모르던 사람도 함께 식사를 하면 공동체가 된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함께 식탁에 앉은 사람끼리는 개인용인 밥과 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반찬은 모두 공용으로 먹는다.
코로나19 이후 한국인의 ‘함께 식사’는 ‘혼자 식사’로 급속하게 바뀌었지만 ‘밥+국+반찬’을 입안에서 어울려 먹고 비빔밥과 국밥을 즐겨 먹는 한국 문화 속에는 식구의 관념이 여전히 강력하게 흐른다.
- 글 주영하
- 주영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인류학자로 한국고등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같이 놀래?
K-놀이 문화에 담긴 어울림의 정서
블랙핑크 멤버 로제가 부른 ‘아파트’에 담긴 한국의 술 게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 2〉로 화제가 된 공기놀이와 제기차기. K-콘텐츠의 전 세계적 인기와 더불어 한국의 놀이 문화에 대한 관심 또한 커지고 있다. 이른바 ‘K-놀이 문화’에는 어떤 매력이 숨겨져 있는 걸까?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로제가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함께 불러 전 세계적 인기를 끈 노래 ‘APT.’(이하 ‘아파트’)는 그렇게 시작한다. 이 곡은 한국인이라면 익숙한 술 게임에서 따왔다. 노래가 가진 흥겨움이 이 곡의 매력이지만 한국의 놀이 문화가 갖고 있는 재미 요소 또한 이 곡이 신드롬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다. 실제로 노래의 인기와 더불어 유튜브에는 전 세계인들이 ‘아파트 게임’을 하는 진풍경이 밈처럼 번져나갔다. 우리는 이미 〈오징어 게임〉을 통해서도 이런 경험을 한 바 있다. 드라마가 글로벌 열풍을 일으키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이 작품에 등장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게임’ 같은 놀이를 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오징어 게임 시즌 2〉에서는 공기놀이, 제기차기와 함께 ‘둥글게 둥글게’ 짝짓기 게임이 화제가 됐다. 외국인들에게는 낯설 수 있는 한국의 놀이 문화가 이렇게 유행처럼 퍼져나가게 된 비결은 뭘까? 그건 바로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쉽지만 일단 한번 해보면 빠져들게 만드는 강력한 중독성이다. 이것은 한국 놀이 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번 〈오징어 게임 시즌 2〉에서 화제가 된 공기놀이는 다섯 알의 공기를 던지고 받고 접으며 하는 놀이인데, 작은 돌이든 주사위든 다섯 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나 ‘둥글게 둥글게’ 짝짓기 게임은 심지어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저 여럿이 모이기만 하면 할 수 있는 놀이다.
이들 놀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은 ‘함께 어울린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전통놀이는 사실상 함께 어울리는 것만으로 놀이가 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명절이면 가족이나 이웃, 친구들이 모여 즐기던 윷놀이는 그 공동체의 친목을 다지게 하고, 강강술래는 여러 사람이 모여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동안 서로가 이어진 존재라는 걸 체험하게 하며, 널뛰기는 널을 놓고 양편에서 번갈아 뛰어오를 때 두 사람이 협동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 제기차기나 딱지치기, 팽이치기, 공기놀이, 연날리기 등 혼자서도 할 수는 있지만 둘 이상이 모여 함께해야 그 맛이 나는 놀이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처럼 함께 어울려서 노는 놀이 문화가 우리나라 만의 특징은 아니다. 그럼에도 특히 최근 들어 K-콘텐츠를 통해 새삼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한국의 놀이 문화가 함께 어울리는 놀이들의 특징을 제대로 보여주는데, 과거 농경사회에서 체화된 공동체문화가 한국 사회에 여전히 특징적인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역시 농경사회를 벗어나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로 넘어왔지만 과거의 놀이 문화에 대한 향수와 추억은 여전하다.
〈1박 2일〉부터 〈신서유기〉까지, 윷놀이나 제기차기 같은 전통놀이를 게임화해서 보여주는 무수한 TV 예능 프로그램이 최근까지도 나오는 이유다. ‘아파트’ 노래 속 술 게임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놀이 문화는 그 형태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어울림의 정서가 이어지고 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보여줬던 응원 문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붉은악마’라는 응원단에 맞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마다 빨간 티셔츠를 차려입고 응원했던 모습이나 경기장에서 “꿈은 이루어진다” 같은 문구를 카드섹션으로 모두가 함께 표현해 내는 모습 속에는 함께해서 즐거운 어울림의 놀이 문화가 담겨 있다.
이러한 놀이 문화는 최근 한국인 특유의 팬덤 문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K-팝 팬덤이 공연장에 함께 모여 보여주는 팬덤 문화는 한국 놀이 문화의 콘서트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리 인터넷을 통해 응원 안무와 구호를 배워 온 팬들이 일사불란하게 노래에 맞춰 응원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는데, 이 또한 팬들의 놀이 문화다. 최근에는 이 콘서트 문화에 디지털이 가세해 색과 불의 점멸까지 조정할 수 있는 응원봉이 더해지면서 공연장 풍경이 더 다채로워졌다. 이러한 특유의 어우러지는 팬덤 문화는 해외 아티스트들이 한국에서 공연하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자리 잡게 됐다.
K-팝 팬덤 문화처럼 한국의 놀이 문화는 현재에도 새로운 형태로 이어지는 중이다. 디지털로 연결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타고 그 어울림의 대상 또한 지구촌으로 넓혀지고 있다. ‘아파트’의 술 게임이나 〈오징어 게임〉의 놀이들이 밈처럼 번져나가는 데에는 그 밑바탕에 깔린 한국인 특유의 어울림의 정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인만이 아닌 전 세계인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이 한국의 놀이 문화를 통해 열리고 있다.
- 글 정덕현
- 정덕현은 대중문화 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로 기고, 방송, 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 에디터. 이정주
- 사진. 박찬우
- 요리. 김정은
- 한식 다과 제작. 노영옥
- 스타일링. 이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