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규라는 프리즘을 통한 시공간 여행
2025년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할 한국 아티스트는 단연코 양혜규다. 국제 미술 현장을 종횡무진하며 새로운 현대미술사를 써나가고 있는 양혜규를 〈모닝캄〉이 만났다.

양혜규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거슬러 지난 2004년. 한 젊은 작가는 보관할 곳도, 더 이상 끌고 다닐 수도 없는 작품들을 포장해 쌓은 〈창고 피스〉라는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것은 팔리지 않는 작품을 계속 만들 수밖에 없는 젊은 작가의 혹독한 현실과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패기 어린 예술적 발언이었다. 이후 20여 년이 흘러 2025년 3월 현재.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 위치한 내셔 조각 센터에서는 2003년 설립 이후 최초로 한국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데 그 전시의 주인공이 양혜규다.
양혜규 작가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대서양을 넘어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도 이어진다.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네덜란드의 쿤스트할 로테르담에서는 약 30년에 이르는 양혜규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양혜규: 윤년〉전이 열리고 있다. 2024년 10월 9일부터 2025년 1월 5일까지 런던 헤이워드갤러리에서 개최된 동일 전시의 순회전으로 설치, 조각, 콜라주, 텍스트, 비디오,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작품 120여 점을 서베이 전시 형식으로 다룬다. 영국 코톨드미술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를 지낸 줄리언 스탈라브라스는 “양혜규는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 중 한 사람이다. 그녀의 작품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평했다.
이처럼 양혜규는 오늘날 전 세계 미술관과 비엔날레 등으로부터 끊이지 않는 러브콜을 받고 있는 ‘믿고 보는’ 작가이며, 흥미로운 논쟁마저도 국제적 영향력으로 증명하는 아티스트다. 집요함을 드러내는 그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 융합과 분산, 물질과 영성 등 상반된 것들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사고 속에서 늘 감상자와의 접점을 찾아낸다.
한편 2026년에는 뉴욕 JFK 공항 6터미널에 양혜규의 작품이 설치될 예정이라 뉴욕 여행길에서도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됐다. 〈모닝캄〉이 국내외 미술계를 막론하고 지금 가장 주목할 작가인 양혜규를 만났다.

인터뷰
〈아트리뷰〉지가 발표한 미술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2024 파워 100’에 48위로 선정되셨어요. K-아트를 널리 알리는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계십니다.
근래 저에게 중요해진 키워드는 노화 그리고 성숙이에요. 과거에는 치기 어린 마음에 저명한 작가일수록 작업량이 감소하거나 작품 발표가 느슨해지는 것에 대한 반감 같은 게 있었어요. 하지만 하면 할수록 시작하는 것이 제일 쉽고, 유지하는 것은 참 어렵고, 명성을 이룬 뒤 또 한 번 도약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됐죠. 그래서 새로이 뭔가를 시도해야 하는 지금과 같은 국면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새삼 자각하면서, 동시에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현행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걸 목도했기에 저는 제 앞의 국면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볼 수 있는 성숙함을 갖추고 싶어요. 미술이나 문화에 순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매번 미술계에 새로운 화두가 대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선정된다면 그건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Courtesy of the artist and Nasher Sculpture Center © Kevin Todora
헤이워드갤러리에서 열린 〈양혜규: 윤년〉 전시에 대한 평단이나 대중의 관심이 높았어요.
헤이워드갤러리에서 서베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스스로 저 자신의 성숙도를 가늠해 본 것 같아요.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저에게 큐레이터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큐레이터의 성향이 전시에 얼마나 반영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이 작가로서 저의 성숙도를 얘기해 주거든요. 지금까지 저를 지원하고 응원했던 분들은 저보다 커리어가 더 높은 분들이었어요. 저에게 미술사적 양분을 공급하면서 이끌어준 이들이었죠.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플럭서스 같은 미술사의 큰 흐름에 저를 포섭하고 서구 미술사에 저 같은 낯선 외국 작가들이 안착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진 분들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미술관도 세대교체를 했죠. 예를 들어 헤이워드갤러리 경우에도 관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큐레이터가 저보다 나이가 적어요. 이 전시를 담당했던 융 마 역시 아시아 출신의 디아스포라지만, 저보다 젊은 세대죠. 이제 제가 그들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국면에 처했다는 의미인데, 이런 세대 및 세태의 변화가 저에겐 중요하고 또 즐거워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 저 같은 작가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기획하면서 알게 될 수 있으니까요. 작가가 명성을 얻으면서 제일 잃기 쉬운 것이 바로 생명력이라고 생각해요. 한 작가가 안녕과 평화, 행복과 번영이 보장된 성공을 이루면 뭐 하나요? 다음 세대와의 연관성이 사라져버린다면 예술적으로는 죽은 거나 다름없죠. 대중은 전시의 표피만 보겠지만 한 작가가, 또 한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전시로 〈양혜규: 윤년〉을 기획했어요.

© Studio Haegue Yang
내셔 조각 센터에서의 첫 한국인 전시이자 미술관이란 공간에 반응하는 전시라 해서 기대됩니다.
내셔 조각 센터는 큰 규모를 자랑하는 기관은 아니지만 작가주의적 시도를 배려하는 모험적인 장소예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뉴욕, 파리, 런던 등의 주요 기관에서는 도모하기 어려운 실험을 할 수 있어요. 저도 이번 전시에서 모험을 감행했어요. 신작 비율을 높여서 기존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했어요. 덕분에 시행착오도 많았지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 중에는 크기가 30cm 미만인 소형 조각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데, 그게 제게 일종의 자기 도전이 됐어요. 매번 헤비급 경기만 치르다가 이번에 확 감량하고 경량급으로 승부해 보기로 한 거죠. 이런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매우 좋습니다.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Bass Museumof Art, Miami Beach © Zachary Balb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Nasher Sculpture Center © Tim Hursley
마지막 질문입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르는데, 작가님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anachronic’이란 게 있어요, 시간순을 뜻하는 ‘chronic’에 ‘ana’라는 반접두사가 더해진 단어예요. 한국말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저는 단순히 시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해 작업 안에서 활용해요. 시간의 개념은 개인마다, 지역마다 다를 수 있거든요. 지금 시대만 봐도 누군가는 개발 과정을 순차적으로 겪었지만 또 누군가는 한 번에 몰아서 경험하게 될 수도 있어요. 시간의 무게나 압축성 같은 문제들이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거죠. 제가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1990년대만 해도 평생 지속될 줄 알았던 ‘어버니즘’이라던가 ‘글로벌화’ 같은 화두가 이후 이토록 다양하게 바뀔 줄 몰랐어요. 일생 동안 여러 개의 챕터가 압축적으로 전개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거죠. 이런 현상을 좋다, 나쁘다 혹은 손쉽게 압도적이다 등으로 뭉뚱그려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모든 세대는 자기만의 시대성을 갖고 있고, 제게는 그걸 감당하고 만끽하고 심지어는 그 야성의 파도 위에 올라타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시간과 시대에 대한 이해도나 독해력을 더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 타 문화, 세계의 생각이나 활동에 좀 더 관심을 갖고, 보고, 생각해야 하겠죠.
양혜규를 만날 수 있는 곳

내셔 조각 센터
Haegue Yang: Lost Lands and Sunken Fields February 1, 2025–April 27, 2025
내셔 조각 센터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위치한 조각 미술관으로 부호이자 예술 후원자인 레이먼드 내셔와 그의 아내 패츠 내셔가 수집한 방대한 20~21세기 조각 컬렉션을 기반으로 설립됐다. 프리츠커건축상 수상자이자 ‘빛의 건축가’로 불리는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미술관으로 예술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양혜규는 내셔 조각 센터의 건축적 특징에 반응해 빛과 어둠, 공중과 지상, 부력과 중력, 희소함과 밀도라는 일련의 대조를 탐구한다. 빛으로 가득한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천장에 매달린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 nashersculpturecenter.org
- 대한항공 인천 — 댈러스 직항 편 주 7회 운항
쿤스트할 로테르담
Haegue Yang: Leap Year March 1, 2025 ― August 31, 2025
쿤스트할 로테르담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으로 직선적인 형태와 개방감을 강조하는 현대적이고 독특한 건축 디자인이 특징이다. 〈양혜규: 윤년〉전은 설치미술, 조각, 비디오, 텍스트, 오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120여 점의 방대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알루미늄 블라인드, 건조대, 금속 방울과 같은 일상적인 물체들을 통해 감각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키며, 추상과 구상의 대립과 같은 기존의 이분법적 구분을 해체한다.
- kunsthal.nl
- 대한항공 인천 — 암스테르담/스키폴 직항 편 주 4회 운항


세인트루이스현대미술관
Haegue Yang September 5, 2025–February 8, 2026
세인트루이스현대미술관, 일명 CAM은 설치미술, 회화, 조각,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와 형식의 작품들을 전시하며, 신진 작가부터 유명 현대 작가들까지 폭넓게 소개한다. 현대적인 건축물의 구조와 디자인은 미술관 전시와 밀접하게 연관돼, 예술을 경험하는 과정 자체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는 CAM에서 열리는 양혜규의 첫 개인전으로 미술관 건축에 대응하는 신작이 공개될 예정이다. 미시시피강의 경관과 세인트루이스 지역의 식민지 이전 역사를 고찰하는 이번 전시를 기대해도 좋다.
- camstl.org
- 대한항공 인천 — 애틀란타, 시카고, 댈러스 직항(주 7회) 및 경유 편 탑승
M플러스
홍콩 서구룡 문화 지구에 위치한 현대미술관으로 2021년 개관했다. 현대미술, 디자인, 건축, 영화, 미디어아트 등에 이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며, 글로벌 예술의 흐름을 보여준다.
M+는 〈양혜규의 소리 나는 구명 동아줄〉(2021~2022) 시리즈 총 9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 외에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위트레흐트 편篇〉(2006), 〈의상동차〉(2012), 〈광원조각〉, 〈비디오 3부작〉(2004~2006), 〈건축
자재상〉 콜라주 등을 소장하고 있다.
- mplus.org.hk
- 대한항공 인천 — 홍콩 직항 편 주 21회 운항

- 글. 최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