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낙원을 탐색하는, 니콜라스 파티
니콜라스 파티는 파스텔의 부드러운 물성을 대담한 색채와 결합해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다. 잠시 열렸다 사라지는 ‘낙원의 문’처럼 그의 작품은 감상자를 내면의 깊은 풍경으로 이끈다.
파스텔로 심상의 풍경을 그리다
파스텔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먼지가 깃든 동굴 같은 풍경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놓인 초상들. 이 같은 자신만의 고유한 시각언어를 바탕으로 현재 국제 미술계에서 크게 주목받는 작가가 있다. 바로 스위스에서 태어나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니콜라스 파티다. 파티는 고전적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강렬한 색채와 단순화된 조형 감각을 결합해 독자적인 미학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는 한때 주변적 재료로 여겨졌던 파스텔을 회화, 드로잉, 조각을 잇는 매체로 확장하며 전통 위에 새로운 실험을 더한다. 또한 전시 공간 전체를 하나의 회화적 장면으로 변모시키며, 회화와 설치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그가 그려내는 풍경은 자연의 논리를 초월한 색과 형태로 구성된 상상의 공간이며, 인물은 개별적 특징을 지운 채 보편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상징적인 존재다. 파티에게 낙원은 실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자리한 감정이자 기억에 가까운 그 어떤 것이다. 평론가 슈테판 반츠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낙원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 그리움”을 자극하며 관객을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로 이끈다. 그리고 “파스텔이라는 섬세한 재료와 만나 독특한 긴장감을 얻는”다.
그의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과거와 현재의 교차’다. 파티는 전시 종료와 함께 사라지는 대형 파스텔 벽화를 현장에서 직접 제작함으로써 회화가 지닌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작품이면서 동시에 소멸을 전제로 하는 벽화의 운명은 그의 작품에 깊은 감정적 울림을 부여하며, 감상자가 한층 더 그림에 몰입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세계관은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첫 한국 개인전 〈더스트〉(2024. 8. 31~2025. 1. 19)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파티는 다섯 점의 벽화를 새로 제작해 미술관 공간을 완전히 재구성했다. 서늘한 녹색 동굴과 연보랏빛 하늘, 색면으로 이루어진 풍경들은 한국 전통미술 소장품과 어우러지며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각적 대화의 장을 형성했다. 궁극적으로 파티는 이미지가 지닌 고유한 힘을 되살리며, 관객을 상상의 낙원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서도록 만든다.
이러한 파티 특유의 회화 세계는 미술시장에서도 뚜렷한 반향을 일으켰다. 2021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랜드스케이프〉가 327만 달러에 낙찰된 데 이어, 2022~2023년 홍콩 경매에서는 600만 달러를 넘는 기록이 이어졌다.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더불어, 글로벌 컬렉터층에서 그가 확고한 지지를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터뷰
2024년 말 열렸던 전시를 통해 한국 관객들과 처음 만나셨습니다. 전시를 통해 가장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호암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미술관의 한국 고미술 컬렉션과 제 작품이 한 공간에 나란히 전시될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뜻깊었습니다. 역사적 작품들과 동시대 작품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펼쳐질지 무척 궁금했고, 진심으로 기대됐습니다. 작품들이 모두 설치된 뒤에야 비로소 그 교류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과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공명하는 순간이었죠. 그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랐고, 동시에 매우 기뻤습니다. 두 세계의 병치는 억지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살아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대담한 색채는 작가님의 시그니처 언어가 됐습니다. 색을 선택하는 영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파스텔이라는 매체는 작가님의 회화 세계를 어떻게 규정하나요?
대담하고 선명한 색채와 강한 대비에 끌리는 제 취향은 분명 저의 초기 그래피티 작업 활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밤 시간대에 거리에서 그림을 그릴 때 색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필수 요소입니다. 즉각적이고 명료하며 생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제 작업은 더 내면적이고 더 직관적으로 변해왔습니다. 저는 이를 요리에 비유하곤 합니다. 향신료를 넣는 데 정해진 공식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고, 그 맛이 입에 맞기 때문에 넣는 것이잖아요. 제게는 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울림이 생길 때까지, 색의 강도 · 조화 · 긴장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합니다. 그건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일이지, 이성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그렇긴 해도, 저는 늘 예술을 보고 있습니다. 제 스튜디오에는 책이 정말 많습니다. 저는 많은 시간 책을 보며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데, 그 과정에서 색채는 언제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제가 크게 영감을 받은 작가들은 밀턴 에이버리와 헬렌 프랑켄탈러입니다. 이들의 색채 감각은 때때로 놀랍도록 강렬하고 낯설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깊이와 섬세한 균형을 갖추고 있으며, 어떤 물리적인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회화를 넘어 조각과 벽화로 영역을 확장해 오셨습니다. 매체를 오가며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나 대화가 열렸나요?
저는 평면 위에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행위 자체가 저를 정의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 안에만 머무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회화가 어떻게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을지, 벽으로 뻗어나갈 수 있을지, 입체와 만나며 몸으로 경험되는 세계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벽화는 몰입적이고 파노라마적이며, 관객의 움직임이나 공간과 결합합니다. 그렇게 더 멀리 밀어붙이고자 하는 충동은 저를 조각으로도 이끌었습니다. 3차원 오브제에 페인트를 입힌 것이 회화가 되고, 그 회화가 다시 오브제가 되도록 만드는 방식이죠. 저는 전시에서 이러한 시도를 함께 보여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공간을 감싸는 벽화, 독립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회화, 흐름을 붙잡거나 끊어내는 조각들. 이 모든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관객이 전시된 공간을 이동하며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전시 공간에 머물며 작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빛과 공기, 현존하는 감각이 어떻게 작품에 흔적을 남기나요?
저는 현장에서 작업하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한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감정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그곳과 깊이 연결되는 순간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은 많은 것을 바꿉니다. 깊이 몰입하는 과정이 제 작업을 기술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변화시킵니다. 저는 제 작품이 단순히 ‘전시장에 놓인 대상’이 아니라, 마치 그 장소에서 스스로 ‘자라난 것’처럼 느껴지길 바랍니다.
무표정한 인물, 시간과 변화하는 풍경이 자주 등장합니다.
제가 그리는 초상은 대체로 조용한 얼굴입니다. 표정은 절제돼 있고 거의 중립적이죠. 저는 이 얼굴들을 일종의 비워진 존재감, 즉 인간 이미지가 점점 더 조작되는 시대를 비추는 고요한 거울로 바라봅니다. 현대사회 속 우리는 메이크업 광고, CGI 영화, 필터가 적용된 소셜미디어, 보정된 사진 등 변형된 얼굴들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제게 예술은 거울이자 동시에 통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그 안의 집착 · 왜곡 · 욕망을 반영하면서도, 그 바깥으로 나갈 길을 열어주죠. 예술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우리를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는 곳으로 데려가는 수단이자, 지금의 본질을 말하는 매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얼굴을 그릴 때 단순히 ‘지금’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과거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려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당신의 작업은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예술은 생존을 위한 도구입니다. 이토록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존재하려면, 아예 이 혼란이 의미를 갖게 되거나 혹은 아무것도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제 작업은 색채와 에너지 그리고 약간의 부조리함을 불러옵니다. 그것은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처를 제공합니다.
여행은 작가님의 삶과 작업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작업하는 것은 제게 큰 축복이자 영감의 원천입니다. 여행마다 감각의 순간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져 쌓이며, 제가 보는 방식과 작업하는 방식에 은근하고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최근 있었던 한국에서의 경험은 더욱 의미가 컸습니다. 전시를 위해 6주 동안 서울에 머물며, 그 공간에서 작업하고 그 도시를 살아냈죠. 그 경험들은 지금도 제 작업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니콜라스 파티를 만날 수 있는 곳
퐁피두센터 메스
Copyists
June 14, 2025 - February 2, 2026
프랑스 메스에 위치한 퐁피두센터의 첫 지역 분관으로 실험적 기획전을 선보이는 유럽의 대표 문화기관이다. 독창적인 건축과 큐레이션으로 주목받으며, 대담하고 유연한 전시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카피스트〉는 루브르박물관과 퐁피두센터 메스의 공동 기획전으로, 고전 작품을 ‘복제’하는 행위를 창작의 출발점으로 바라보는 실험적인 전시다. 니콜라스 파티를 포함한 현대 예술가 100명이 원본 · 복제 · 이미지의 관계를 새롭게 탐구한다.
- centrepompidou-metz.fr/en
- 대한항공은 인천 — 파리 직항 편을 주 6회 운항한다.
MICAS 몰타 국제 현대미술 공간
Colour, Form and Composition:
Milton Avery and His Enduring Influence on Contemporary Painting
October 25, 2025 - April 4, 2026
2024년 10월 개관한 몰타공화국 최초의 전문 현대미술관. 역사적인 군사 요새를 현대미술 공간으로 리노베이션함으로써 유산 보존과 미술관 기능을 동시에 실현했다. 〈밀턴 에이버리〉전은 미국 근현대 회화의 거장 밀턴 에이버리가 남긴 색채 · 형식 · 구성의 미학이 오늘의 회화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조명한다. 에이버리의 회화와 수채화 20여 점을 중심으로 니콜라스 파티, 조나스 우드, 게리 휴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나란히 소개하며, 서로 다른 시대의 조형 언어가 어떤 방식으로 대화하는지 보여준다.
- micas.art
- 대한항공은 인천 — 로마 직항 편을 주 3회 운항한다.
- 글. 최진이
- 사진. 작가 및 리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