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 February 2026 (Vol. 50 No. 01)

도시를 경험하는 방법

〈모닝캄〉은 일상의 풍경에 깊은 사유를 더한 ‘옴니버스 스토리’를 전한다. 다국적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시선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이, 비행 중에도 비행이 끝난 후에도 독자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영화라는 창을 통해 한국과 세계를 이어온 달시 파켓은 도시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거대한 명소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장면들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 달시 파켓은 미국 출신의 영화평론가이자 번역가로, 1990년대 후반 한국에 정착해 한국영화 산업과 작품을 연구해 왔다. 한국영화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영문 웹사이트 ‘Koreanfilm.org’를 개설해 해외 관객과 연구자들에게 주요 참고 자료를 제공했으며,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를 비롯한 국내외 영화제에서 자문과 비평 활동을 이어왔다. 또한 〈기생충〉을 포함한 수백 편의 한국영화 대사를 영어 자막으로 옮기는 번역에 참여하며, 한국영화를 해외 관객에게 소개하는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

오래전 파리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노트르담대성당, 오르세미술관처럼 파리에 가면 누구나 방문한다는 명소들을 모두 둘러봤다. 그곳들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선명하고, 어딘가에는 그날 찍은 사진들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그 여행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마음을 두드리는 장면은 아주 평범했던 어느 아침의 풍경이다. 아내와 함께 카페의 작은 야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바게트와 라즈베리 잼, 치즈, 스크램블드에그를 먹던 순간. 메뉴는 소박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프랑스 음식이 대체로 그렇듯이). 하지만 그날 아침이 특별했던 이유는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순간의 나는 이상할 만큼 편안했다. 흐르듯이 오가는 사람들,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 도시의 소리, 이 모든 것들이 내 몸 깊숙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떠다니는 감각이 나를 조용히 감싸고, 나는 하루의 목적도 계획도 내려놓은 채 그저 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이 내 인생의 파리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 기억될 장면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여행은 참 묘하다. 우리는 흔히 멀리 떠난다고 하면 일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특별한 장면을 보기 위한 기회라고 여긴다.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을 보는 것처럼.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여행을 다시 떠올려보면, 가장 크고 특별했던 순간은 의외로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장면들일 때가 많다.


나는 스무 살 무렵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났고, 그 뒤로 수없이 많은 멋진 장소들을 만났다. 사진을 찍고, 이름난 명소들을 직접 돌아보고, 눈길을 끄는 기념품도 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면 늘 마음 한구석에 작은 허기가 남았다. 새로운 곳에 가 있었지만, 정작 그 도시를 온전히 경험하거나 ‘느끼지’ 못한 것 같다는, 매우 설명하기 어려운 허무함이었다. 물론 여행을 즐기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빼곡한 일정표를 들고 관광지, 쇼핑, 맛집을 부지런히 찾아다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여행을 예술이나 역사, 건축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공부로 삼기도 한다. 물론, 여행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즐기면 된다. 하지만 혹시 시도해 보고 싶은 누군가를 위해, 조금은 다르게 여행하고 경험하는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여행의 시작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멀리 떠나는 이유는 결국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 시간과 돈을 들여 떠나면서, 정작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여행에서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바란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즐거움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을 원한다. 비록 다시 그곳을 방문하지 못하더라도, 훗날 오랜 시간 여행의 장면들을 꺼내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여행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의식적으로 평범하지만 즐거운 순간들을 여행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순간들을 글과 사진으로 차곡차곡 기록해 오래도록 마음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다.

첫 번째 방식에는 약간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일상에서 내가 진심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활동들을 목록으로 하나씩 적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책하기, 공연장에서 음악 감상하기, 스포츠 경기 관람, 헬스장 운동, 미술관 방문, 독서, 요리, 요가, 옷 쇼핑, 와인 한잔 즐기기, 영화 보기, 스케치하기, 춤추기, 연극 관람, 테니스 치기 등등. 물론 내용은 사람마다 전혀 다를 것이다.

그다음에는 적어놓은 목록 중 이번 여행에서 꼭 해보고 싶은 활동을 몇 가지 골라보면 된다. 다만 너무 많지는 않은 것이 좋다. 하루에 하나 혹은 많아도 둘 정도면 충분하다. 어떤 활동은 미리 계획해야 하거나 약간의 창의력을 가미할 필요가 있을 테다. 또 어떤 활동들은 언어가 장벽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특히 도시 여행에 어울린다. 해변에서의 여유로운 시간도 물론 즐겁지만, 그것은 도시를 걸으며 만나는 감각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아래는 도시 여행에서 참고할 만한 다섯 가지 활동 예시다.

1. 공공도서관에서 잡지 읽기
공공도서관은 1~2시간을 보내기에 꽤 아늑하고 동시에 마음에 오래 남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예전에 볼로냐에서 사흘을 머문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가 시내 중심에 있던 도서관에서 보낸 몇 시간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읽고 싶은 잡지를 골라 리스트에 적어두고, 도착한 도시의 도서관에서 그것을 직접 찾아 읽어보자. 아마도 생각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2. 대학에서 음악 공연 관람하기
라이브 음악만큼 새로운 도시의 생동감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경험도 드물다. 그렇다고 굳이 유명한 공연장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도시의 음악학교나 대학 음악학과에서 열리는 공연 일정을 살펴보자. 유명 음악학교에서 열리는 재즈나 클래식 공연은 기억에 남을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무료일 때도 있다.

3. 1시간 정도 산책, 하이킹, 러닝하기
걷기나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여행 중이라도 이를 일정에 꼭 포함해 보기를 추천한다. 뉴욕의 아침을 센트럴파크 한 바퀴 달리기로 시작하는 것, 그보다 더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 있을까? 또 서울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도시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도 숲길을 따라 몇 시간이고 걷는 일이 가능하다.

4. 카페에 앉아 눈앞의 풍경 스케치하기
그림 실력이 뛰어나든 아니든, 여행 중 눈앞에 보이는 흥미로운 장면을 스케치해 보자. 이 작은 행위가 특별한 행복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단한 대상을 찾거나 멋진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과정에 몰입해 그 순간을 즐기면 된다.

5. 미술관에서 전시 관람하기
미술관은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르는 흔한 코스처럼 보이지만, 많은 이가 그곳을 찾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즐겁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배움을 선물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히 미술관을 고르는 대신, 여행을 떠나기 전 잠시 시간을 내어 여행지에서 열리는 전시를 미리 살펴보고 취향에 맞는 전시를 골라두자. 그렇게 하면 훨씬 더 나에게 맞는 풍부한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건 단순한 예시일 뿐이고, 각자의 목록은 모두 다를 테다. 어쩌면 원데이 쿠킹 클래스나 탱고 레슨처럼 직접 참여할 만한 프로그램이 있을 수도 있고, 여행 기간에 맞춰 열리는 특별한 축제나 스포츠 이벤트가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위에 적힌 평범한 활동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지도모른다. ‘이런 건 집에서도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소중한 여행 시간을 써가며 해야 하지?’ 특히 내가 외국에 가면 즐겨 하는 일 중 하나가 영화관에 가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런 반응을 자주 듣는다. 집에서 보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하지만 내 대답은 늘 같다. 우리가 일상적인 활동을 경험하는 데에는 장소와 환경이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평소 좋아하던 일을 낯선 도시에서 해보면, 똑같은 행동이라도 그 순간은 특별해지고, 기억에도 훨씬 오래 남는다. 나는 지금도 런던의 ‘커즌 소호’ 영화관에서 〈이니셰린의 밴시〉를 봤던 순간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같은 영화를 집에서 혼자 봤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기억으로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여, 나의 취향과 관심사에 맞춘 경험은 그 기억 자체가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된다. 물론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은 (사람들의 소음과 붐빔만 견딜 수 있다면) 분명 강렬하고 잊기 어려운 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천 명이 같은 방식으로 공유하는 그 경험은 결국 누군가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잡지를 펼쳐 읽은 시간은 다르다.

두 번째 여행법은 조금의 글쓰기를 포함한다. 사실 여행 일기라는 개념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것이니 전혀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행지에서 경험한 순간들을 기록해 두는 ‘도시 노트’를 만들어보길 권한다. 디지털이든 종이든 상관없다. 또 굳이 여행의 매순간 바로 글을 쓸 필요도 없다. 대신, 그날 밤 혹은 다음 날 아침처럼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을 때 잠시 시간을 내어 느낌을 적어보면 좋다. 완성도 높은 글을 쓸 필요도, 멋진 문장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흩어진 문장 몇 개, 단편적인 메모 몇 줄이면 충분하다. 사진까지 함께 붙일 수 있으면 더 좋다.

여기서 핵심은 그 경험을 억지로 특별하거나 대단한 순간으로 포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을 가능한 한 구체적인 디테일로 기록해 두는 것이다. 그래야 훗날 그 장면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당시의 감정과 분위기를 적을 때는, 오감 전체를 동원해 느꼈던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자.

다섯 개 정도(혹은 더 많은)의 경험들을 기록한 뒤에는, 마지막에 ‘관광’ 챕터를 하나 덧붙이자. 애써 떠난 여행에서 평범한 경험만 할 수는 없으니까. 로마에 간다면 당연히 콜로세움은 꼭 봐야 한다. 다만 도시 노트에서 글쓰기의 중심은 개인화된 경험들에 두고, 이 ‘관광’ 챕터는 훨씬 간단하게 구성하자. 사진 몇 장과 코멘트 정도면 충분하다(원한다면 ‘음식’ 챕터를 추가해도 좋다).

이상 내가 제안한 여행법은 얼핏 보기에 나 홀로 여행자에게 어울릴 것 같아 보일 수 있지만, 동행자가 있는 여행에서도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각자 따로 도시 노트를 쓰고, 여행이 끝난 뒤 서로의 노트를 교환해 읽어보는 것이다. 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두 사람의 시선은 완전히 다르기 마련이고, 새롭게 다시 그 순간을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

물론 도시 노트를 만드는 데는 분명 어느 정도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미래의 기억을 온전히 붙잡아 두는 데 글쓰기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 아무리 즐거웠던 여행이라 해도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은 조금씩 흐려지고, 장면들은 서서히 색을 잃어간다. 그렇지만 몇 년 뒤 책장 한편에서 ‘멜버른 2025’ 혹은 ‘하노이 2026’이라고 적힌 당신의 도시 노트를 다시 펼친다면, 그 도시에서 보낸 시간들이 놀랄 만큼 생생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 글. 달시 파켓
  • 사진. 김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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