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 August 2026 (Vol. 50 No. 04)

<반도의 무희>, 2019,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사진: 홍철기

예술은 우리 안에 또 다른 시간을 연다, 남화연

영상과 퍼포먼스, 리서치와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시간과 기억, 몸의 움직임을 탐구해 온 남화연은 한국 동시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그는 기록의 바깥으로 흘러간 시간과 사라진 감각의 흔적을 현재로 다시 불러오며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 왔다. 사진 중심의 일우사진상이 일우미술상으로 확대 개편된 이후 첫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오는 8월 일우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연다.

우리 안의 또 다른 시간

남화연의 작업에는 늘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하나는 역사와 기록 속에 남은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의 몸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감각의 시간이다. 그는 이 두 시간 사이를 오가며 사라진 움직임과 누락된 기억의 흔적을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불러오는 작업을 이어왔다. 이러한 탐구는 2008년 아트선재센터 전시를 시작으로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파리 팔레드도쿄, 2022년 부산비엔날레 등 국내외 주요 기관과 비엔날레를 통해 꾸준히 확장돼 왔다.

특히 근대 무용가 최승희를 다룬 〈반도의 무희〉 연작은 이러한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그는 역사적 사실 자체보다 기록 밖으로 밀려난 몸짓과 움직임 그리고 사라진 시간의 흔적에 주목한다. 남화연에게 몸은 단순한 재현의 대상이 아니다. 역사와 시간, 정치와 감정을 통과하며 흔적을 남기는 하나의 매개체이자 기억의 장소에 가깝다.
그러나 작가로 살아온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시선은 점차 ‘과거의 인물’에서 ‘존재 자체’로 이동하고 있다. 오랫동안 역사와 기록, 부재와 소멸을 탐구해 왔지만, 결국 그 문제들이 자신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작업이 2022년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당신은 오직 두 번 산다〉(2022)다. 부산항 제1부두에서 촬영된 이 작품은 ‘리허설’이라는 상태에 주목한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진행 중인 시간, 무언가를 기다리는 몸의 감각을 탐구한 것이다. 완성된 결과보다 그에 이르는 과정과 잠시 머무는 순간에 관심을 두면서, 그의 작업은 역사적 기억의 재현을 넘어 인간이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제 남화연은 과거를 복원하기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몸의 감각과 삶의 유한성, 그리고 존재 자체의 시간을 응시한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 자신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최근 들어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감각’과 ‘현재를 살아가는 기쁨’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 역시 과거를 되살리는 데서 나아가 지금 우리의 몸과 시간, 현재의 리듬을 어떻게 감각할 것인가로 향하게 됐다. 결국 우리 삶에서 가장 찬란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화연의 작업은 설명보다 감각으로 기억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작품 속 특정 서사를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가 만들어내는 느린 리듬 속에 잠시 머물러보는 것이다. 익숙한 시간의 속도에서 잠시 이탈하는 순간, 우리는 평소 지나치던 몸의 감각과 시간의 밀도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예술은 우리 안에 또 다른 시간을 열어, 평소 지나치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인터뷰

20년, 작가로서 어제와 오늘

첫 일우미술상 수상자로 기록된다는 점은 작가님께도 특별한 의미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어떤 작업 세계를 보여주고 싶으신가요?

이번 전시는 대한항공 사옥 1층에 위치한 일우스페이스에서 열립니다. 일우스페이스가 제도적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제게는 도전이자 고민이었는데요. 대한항공 사옥은 시청, 덕수궁, 광화문, 청계천 등과 인접한 서울 도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울의 상징적 지역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걷기 즐거운 지역이기도 해요. 전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일우스페이스와 주변을 여러 번 산책하고 인근 건물들,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펴봤어요. 점심시간의 빠듯함과 왁자지껄함, 퇴근 시간 회전문 앞에 줄 서 있는 모습, 낮과 밤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거리의 공기 같은 것들이 인상적으로 남았고, 이에 저는 공간과 장소가 매개할 수 있는 시간의 다른 리듬을 만드는 전시를 계획 중이에요.

ⓒ Chun Eun

작가님의 작업은 리서치와 기록에서 출발하지만 단순히 그것의 재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작업은 보통 어떤 순간에서 시작되나요?

작업이 시작되는 순간을 꼬집어 말하기 힘들지만, 대개 어떤 제약을 돌파하면서 작업이 형상을 갖추게 되는 것 같아요. 제약의 종류는 예산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죠. 일례로 오래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직지심체요절〉을 필사하려고 접촉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접근 자체가 거부되면서 우회전략을 찾게 됐고, 우회전략이 새로운 문제의식이나 형식적 시도로 연결됐는데요. 이런 순간은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짜릿함도 있어요. 어떤 영감이 불현듯 떠오르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계획이나 예상이 지연될 때 견뎌야 하는 시간이 작업의 진짜 시작일 때가 많습니다.

<작전하는 희곡 2009 위트레흐트>, 2009, 단채널 영상, 사운드, 20분

기억과 새로운 움직임 사이에서

2019년 무용가 최승희를 모티프로 한 〈반도의 무희〉 전시는 작가님의 대표적인 리서치 작업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독일에 머물던 시절 댄스 아카이브를 방문하면서 기록 속 정지된 몸의 이미지들이 파생된 원본, 즉 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어요. 동시에 최승희가 부른 ‘이태리의 정원’이라는 1930년대 번안곡을 들으면서 육성, 부재한 신체와 신체 없는 소리에 대해 강한 끌림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최승희의 춤과 그 파편적 기록을 쫓는다고 생각했는데, 한 사람의 몸의 궤적을 쫓다 보니 결국 한국 근현대사, 더 넓게는 아시아의 근현대사와 만나게 됐어요. 최승희의 춤 양식도 당대의 정치·사회적 맥락 안에서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했거든요. 모던 댄스에서 신무용, 동양무용, 월북 이후에는 무용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되죠. 또 저는 최승희가 여성 예술가로서 재현되고 소비되는 방식이나 개인 소장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자료의 공공성과 사적 자원의 범위 등에도 점차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최승희와 같은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 개인사에 앞서는 예술적 궤적에 대한 좀 더 입체적인 진단과 평가, 아카이브의 공적 개방성, 복원을 넘어서는 창작의 조건이자 동력으로써의 아카이브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날 AI의 진정성에 대한 고민과 사유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의 진정성과 본질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진정성은 더 이상 작가의 ‘손’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 행위 그리고 투명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관점에서 AI는 창의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화적, 생태적, 정서적 기억이 담긴 데이터 세트를 AI에게 학습시키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이 열리죠. 예술의 본질은 우리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붓이든 카메라든 혹은 신경망이든, 도구는 달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가브리엘>, 2022, 단채널 영상, 사운드, 20분 4초
<당신은 오직 두 번 산다>, 2022, 단채널 영상, 사운드, 47분 48초

과거의 역사와 기록을 탐구하던 시선이 부산비엔날레를 거치면서 점점 더 현재의 감각이나 존재의 문제로 이동하고 계신 것 같아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리서치에 집중하거나 아카이브를 들여다보는 일을 한창 할 때에는 ‘앎’과 ‘배움’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존재의 유한함이나 삶의 무상함 같은 문제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실 그것은 아카이브와 같은 기록이 반드시 결락을 동반한다는 것, 어떤 존재도 온전히 기억될 수 없다는 것을 재차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근래 제 관심사의 이동이 이전의 실천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특히 부산비엔날레 즈음에는 오랜 시간을 들였던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리서치 기반 작업을 마무리한 이후였기 때문인지 생명, 몸, 죽음, 감정과 같은 문제들을 더 직시하게 됐어요. 또 개인적으로 나이 들어감에 대한 생각도 많아졌고요. 그리고 이런 생각들 때문에 현재를 누리는 기쁨이나 몸의 순간적 감각들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됐습니다.


작가님의 작업은 설명보다 감각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객에게 어떤 경험이 전달되길 바라시나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정보를 아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결국 좋은 예술은 독해 이전에, 정보나 지식의 집적 이전에 그냥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업을 하고 전시를 준비하는 일을 누군가에게 내밀한 편지를 쓰는 것으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편지의 대상은 관객이 아닌 경우가 많지만 그 내밀한 송신의 흔적을 목격하는 경험이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실 관객이라는 말이 제게는 불투명한 관념어처럼 느껴지는데, 작업해 온 시간이 늘어나면서 오래전 제 작업이나 전시를 기억하는 보이지 않았던 수신자들, 구체적 개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과도한 열정>, 2024, 단채널 영상, 사운드, 7분

예술가의 시선과 오늘의 감각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작가님은 오히려 느린 시간과 사라지는 감각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이 지금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정형화된 시간적 리듬과 규범적 구조로부터 이탈하는 순간을 만드는 것은 예술 실천뿐 아니라 한 개인의 일상과 삶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특히나 가속이 일상화된 지금, 우리는 많은 경우 또 다른 시간적 압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죠. 그런 시간적 압박은 편리함이나 효율성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하고요.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어떤 마음으로 경험하면 좋을까요?

이번 전시에서는 긴장감을 내려놓고 미술 관객뿐 아니라 사옥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주변 도심을 오가는 이들까지, 모두가 함께 느림을 경험하는 시간, 무생산의 풍요로움을 느끼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남화연을 만날 수 있는 곳

ⓒ Ilwoo Foundation

일우스페이스

낮잠
8. 18 – 9. 30

일우스페이스는 2010년 대한항공 서소문 사옥 로비를 리노베이션해 조성한 사진·미술 전문 전시 공간으로, 동시대 미술의 접점을 넓혀온 열린 문화공간이다. 일우미술상은 일우재단이 운영하는 프로그램형 지원 제도로, 사진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매체와 작가의 장기적 활동을 지원한다. 이번 전시는 명칭을 일우사진상에서 일우미술상으로 전환한 이후 첫 수상자인 남화연의 개인전으로, 일우스페이스의 장소성에 반응하며 시간과 몸, 현재의 감각을 탐구하는 신작을 선보인다.

  • ilwoo.org

일우미술상, 예술의 경계를 넓히다

일우미술상은 일우재단이 운영하는 동시대 시각예술 지원 프로그램이다. 2009년 제정된 일우사진상에서 출발해 2024년부터 사진을 창작 도구로 활용한 영상,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일우미술상으로 확대 개편됐다. 이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과 창작 환경 조성이라는 일우재단의 설립 정신을 오늘의 예술 환경에 맞게 확장한 결과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예술 생태계 속에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들을 지원하며, 수상자에게는 창작 지원과 개인전 개최 기회를 제공한다.

  • 글. 최진이
  • 사진. 전명은
  • 작품 이미지 제공. 남화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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