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 August 2026 (Vol. 50 No. 04)

남해, 풍경의 대화

남해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유명 관광지를 쫓아 이동하기보다, 다도해의 풍광을 따라 이어지는 길과 낮은 마을 사이를 천천히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이 섬의 구조가 드러난다. 산과 바다가 맞닿은 지형 위에 독특한 생활의 테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곳. 남해의 매력은 장소가 아닌, 풍경이 이어지는 방식에 있다.

남해는 한국의 480개 유인섬 중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하지만 이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크기가 아니라 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바뀌는 풍경이다. 해안 절벽과 다도해, 농경지와 어촌, 오래된 사찰과 새로운 문화공간이 일정한 반경 안에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절묘한 풍경은 자연과 사람이 오랜 시간 함께 빚어낸 결과물이다.


섬 안으로

남해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창선·삼천포대교는 다섯 개의 교량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해상 교량 구간이다. 차창 밖으로 바다가 열리고 섬들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육지의 감각은 조금씩 멀어진다. 특히 붉은 아치 아래를 지날 때는 남해가 왜 ‘다도해의 관문’이라 불리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바다 위를 길게 뻗은 교량 위에서 시선은 멀리 열렸다가 다시 좁아지고, 섬들은 남해 특유의 지형을 천천히 펼쳐 보인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물건리 방조어부림이 기다린다. 물건리 방조어부림은 마을 사람들이 바다의 강한 바람과 해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길이 약 1500m, 폭 30m의 인공 숲이다.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있는 이 방풍림은 남해 사람들이 자연과 공존해 온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붉은 아치가 인상적인 창선·삼천포대교는 남해 여행의 시작을 알린다.
바다와 마을 사이를 길게 감싸고 있는 물건리 방조어부림
ⓒ Courtesy of Namhae County Office

다도해의 파노라마

남해를 한눈에 담고 싶다면 금산 보리암만 한 곳이 없다. 해발 681m 금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보리암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도처이자 전망 명소다. 보리암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는 단순한 바다 풍경과는 다르다. 수많은 섬이 겹겹이 이어지며 독보적인 깊이를 만드는데, 날씨에 따라 색과 분위기도 달라진다. 맑은 날에는 섬들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안개가 끼는 날엔 수많은 섬이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점처럼 보인다.

보리암에서 약 300m 더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금산산장은 이 풍경을 가장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장소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곳은 원래 비구니들이 머물던 암자였으나 지금은 산장 겸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산행 중 자연스럽게 들르기 좋으며 해물파전과 만두, 컵라면 같은 간단한 메뉴를 낸다.

바위 터 곳곳에 놓인 야외 테이블에서 다도해를 바라보며 먹는 따뜻한 음식 한 그릇은 금산산장을 찾는 또 하나의 이유다. 금산에서 내려와 바다 가까이에서 풍경을 마주하고 싶다면 미조항 해상 산책로도 좋은 선택이다. 바다 위를 따라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금산 정상에서 바라봤던 다도해가 이번에는 같은 눈높이에서 또 다른 표정으로 펼쳐진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금산산장은 산행 중 쉬어가기 좋다.
보리암에서 내려다본 다도해는 날씨에 따라 색과 표정을 바꾼다.

지형 위에 새겨진 삶

남해의 마을은 자연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형태를 따라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가천 다랭이마을은 남해 사람들의 삶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농사짓기에 결코 쉽지 않은 산비탈에 선조들은 층층이 돌담을 쌓고 땅을 다듬어 계단식 논을 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삶의 터전은 바다와 어우러진 수려한 경관을 바탕으로 대표적인 농촌 생태 문화 관광지가 됐다. 다랭이 전망대에 오르면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마을 전경은 자연을 극복한 모습이라기보다 자연에 적응한 결과에 가깝다.

다랭이마을이 척박한 지형을 삶의 터전으로 바꾼 이야기라면, 남해독일마을은 먼 타국에서 돌아온 이들이 새롭게 뿌리내린 역사의 한 풍경이다. 1960~1970년대 독일에 파견됐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귀국 후 정착하며 조성한 이곳은 남해의 전형적인 농어촌 마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귀국민들이 직접 현지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와 지은 독일식 주택들은 남해 바다와 함께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귀향의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생활 공간과 개성 있는 상점, 매년 가을 열리는 맥주 축제 등은 20년이 훌쩍 넘는 마을의 역사 속에서도 여전히 색다른 의미와 즐거움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남해 지역 청년들의 아이디어 상품과 공예품, 특산품 등을 만날 수 있는 도르프 청년마켓
ⓒ Namhae Tourism and Culture Foundation

지금의 남해

지금의 남해는 자연과 역사가 만들어낸 풍경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입히고 있다. 오래된 건물을 문화공간으로 되살리고, 지역의 자원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며, 섬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어진다. 돌창고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지역 식재료로 만든 음료를 맛보고 무료 전시도 관람할 수 있는 갤러리 카페로, 과거 곡식을 보관하던 석조 창고를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 특징이다. 남해 곳곳의 보호수를 주제로 한 무료 전시를 꾸준히 열고 있는데, 사진과 회화, 설치 작업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자연과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온 역사를 조명한다. 단순히 카페나 전시 공간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기록하고 지역의 이야기를 현재와 연결하며, 섬이 간직한 시간을 문화로 풀어내는 등 남해가 가진 오랜 자산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앵강마켓에서는 지역 생산자들이 만든 남해의 특산물과 식료품을 만날 수 있다. 남해가 무엇을 생산하고 소비하는지, 지금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죽방렴 멸치와 다시마, 유자 등 남해의 특산물을 현대적인 패키지와 감각적인 큐레이션으로 선보이며, 지역 식재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브랜딩도 활발히 하고 있다.

개인이 사비를 들여 정성껏 가꾼 섬이정원은 지금의 남해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다도해의 수평선, 비탈을 따라 이어진 논, 바닷바람을 견뎌온 숲 그리고 그 곁에서 살아온 사람들. 계단식 지형을 따라 조성된 정원은 남해의 자연환경을 해치지 않고 활용해 섬 고유의 풍경을 오롯이 담아낸다. 이곳은 어쩌면 남해를 가장 많이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인상 한 가지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풍경과 이야기가 겹쳐지며 비로소 완벽한 섬이 되는 남해처럼, 섬이정원도 그렇다.

  • 글. 한미림
  • 사진. 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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