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데이미언 허스트
현대미술은 재현의 문제에서 사유의 문제로 이동해 왔다. 데이미언 허스트는 1990년대 이후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선도한 작가다. 그는 우리가 아름다움이라 믿어온 기준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 구축해 온 질서와 신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든다.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미술이라는 질문, 데이미언 허스트
요즘 서울에서는 특히 화제가 되는 전시 두 개가 열리고 있다. 하나는 전시장에 현대미술이라 하면 익숙하게 떠올리는 그림이나 조각작품 하나 없지만, 분명 작품을 보고 나왔다는 감각을 남기는 전시.
또 다른 하나는 충격적인 이미지와 장면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전시. 방식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두 전시 모두 현대미술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처럼 오늘날 현대미술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일을 넘어 하나의 경험과 장면을 만드는 것이 됐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을 봐야 하는지가 아니라, 이것이 왜 미술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특정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에 가깝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은 어떤 대상을 보여주는 데 머물기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기준과 감각을 재고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이 1990년대 영국에서 센세이셔널하게 등장한 YBA(Young British Artists)였다. 이들은 작가의 활동 방식과 전시 형태, 미술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바꿔놓은 새로운 세대였다. 제도권 미술관이 아닌 창고나 빈 건물에서 스스로 전시를 기획하고 전통적인 재료와 형식에서 벗어난 작업을 선보이며 동시대 미술의 새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그 중심에 데이미언 허스트가 있었다. 지금 서울에서는 그의 대규모 개인전이 아시아 최초로 열리며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허스트는 동시대 미술의 경계를 시험하듯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작업을 선보이며, 미술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의 작품에는 상어, 알약, 해골, 색점, 나비의 날개 등 다소 충격적인 재료로 빚어진 다양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형식은 서로 다르지만 그의 작업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온 질서와 체계 그리고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믿어온 감각들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1990년대 이후 미술은 더 이상 특정한 형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졌고,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 하나의 생각을 제안하는 주체에 가까워졌다. 허스트는 바로 그 변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등장해 수많은 논쟁을 만들어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러 그는 시대의 아이콘이 됐고, 동시에 이제는 그저 교과서 속 작가 아니냐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정리되기에는 그가 현대 미술사에 남긴 족적이 너무 강렬하다.
지금 서울에서 허스트는 다시 한번 묻고 있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그의 작품이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머물러온 이유는, 결국 그의 작업이 삶과 죽음, 질서와 믿음처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Ltd.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장면들
작가로서의 시작, 자화상에 담긴 정체성
데이미언 허스트는 노동자 계층이 사는 지역에서 성장했고, 매우 엄격한 싱글 맘 아래에서 자랐다. 많은 것이 금지된 환경에서 어머니가 유일하게 허락한 게 그림 그리기였다고 한다. 1987년 작품 〈자화상〉에서 그는 얼굴 대신 자신이 입던 옷을 전시하며 “내가 입은 옷이 나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노동자 계층에서 성장한 개인으로서의 출발점을 드러내며, 이후 개념 중심 작업으로 나아가기 전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
YBA와 〈Freeze〉: 런던 아트 신의 탄생
1988년, 런던 골드스미스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데이미언 허스트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런던 도크랜드의 한 빈 창고에서 〈Freeze〉 전시를 기획했다. 세라 루커스, 게리 흄, 마이클 랜디 등 이후 YBA로 불리게 되는 작가들이 처음으로 등장한 전시였다. 당시 영국 미술계는 뉴욕 중심의 미술시장과 담론 영향 아래 있었는데, 이 전시를 계기로 런던의 젊은 작가들이 하나의 장면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찰스 사치가 이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1997년 로열아카데미에서 열린 〈Sensation〉 전시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런던은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때 허스트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 그룹을 등장시키고, 미술시장과 시스템을 움직인 선도적 인물이었다. 허스트의 등장이 세계 현대 미술사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념미술의 확장: 스핀 페인팅과 도트 페인팅
‘이것도 작품인가?’라고 고민하게 되는 개념미술의 극단에 있는 작가가 데이미언 허스트다. 스핀 페인팅은 회전하는 원판 위에 캔버스를 올리고 물감을 떨어뜨려 원심력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회화다. 잭슨 폴록이 몸의 움직임으로 우연한 흔적을 남겼다면, 허스트는 기계의 힘을 이용해 그림을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림의 결과가 아니라, 그림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도트 페인팅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약의 색에서 착안해 동일한 간격의 색점을 반복해 찍는 이 회화는 대부분 조수들의 손을 통해 제작됐고, 점의 크기와 간격, 색의 배열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치됐다. 작가의 감정이나 표현을 최소화한 이 작업을 통해 허스트는 “예술 작품을 반드시 작가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진짜 창작은 실행이 아니라 개념이다.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과학과 종교: 약, 약장, 도트 페인팅
이번 전시에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초기작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허스트는 현대인이 매일 복용하며 의지하는 약이야말로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봤다. 그는 연로한 어머니가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마치 신앙처럼 믿고 복용하는 모습을 보며, 현대인에게 과학과 의학이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약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구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믿음에 가깝다. 허스트의 알약과 약장 작품은 이러한 믿음과 질서 그리고 유한한 삶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시각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2007년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인간의 해골 형태 위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작품이다. 이 작업은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 회화 전통과 연결되는데, 바니타스는 해골, 시든 꽃, 모래시계, 보석 등을 통해 인간 삶의 덧없음과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던 회화 장르였다. 데이미언 허스트는 이 전통적인 주제를 현대적으로 변형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유한한 인간의 삶을 상징하는 해골을 함께 놓는다. 그리고 가장 화려하고 완벽해 보이는 것들도 결국 시간 앞에서는 영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제는 그의 다른 대표작에서도 반복된다. 포름알데히드 속 상어 작품이나 〈천년〉 같은 작품은 삶이 탄생과 소멸이 반복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즉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충격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가 영원할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아주 짧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골, 상어, 나비, 벚꽃처럼 서로 다른 이미지들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역시 모두 유효한 시간 속에 놓여 있다.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리버 페인팅〉, 데이미언 허스트의 회화
이번 전시를 보고 나면, 우리는 데이미언 허스트를 조금 다르게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전시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시각적 충격을 주는 거대한 설치작품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과 물감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화가의 작업실이기 때문이다. 추상과 이미지, 물감과 풍경 사이를 오가는 이 장면은 허스트가 회화라는 형식에 대해 품어온 질문을 다시 보여준다.
허스트는 오랫동안 회화를 동경해 왔지만,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오히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회화 바깥의 방식들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찾아갔다. 스폿 페인팅은 색과 질서에 대한 실험이었고, 스핀 페인팅은 우연과 움직임을 통해 이미지를 만드는 시도였다. 회화를 떠난 것이 아니라, 회화로 돌아가기 위해 다른 경로를 지나온 셈이다.
이번 전시 마지막에 재현된 작가의 실제 작업실과 신작 〈리버 페인팅〉 연작은 그런 시간의 끝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한 장면인 것이다. 템스강을 내려다보는 작업실과 그 창밖 풍경에서 출발한 이 그림들은, 개념적이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던 허스트에게 여전히 ‘그리는 일’이 중요한 현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많은 논쟁과 실험 끝에서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결국 한 화가의 작업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반복해 온 물감과 시간의 풍경이다.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데이미언 허스트를 만날 수 있는 곳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3.20 – 6.28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정리하고 세계의 동시대 미술을 소개하는 주요 전시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왔다.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는 아시아 최초로 열리는 허스트의 개인전이다. 약 40여 년에 걸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으며, 설치, 회화, 조각 등 약 50점의 작품을 통해 그의 작업 전반을 살펴볼 수 있다.
- www.mmca.go.kr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
영국 런던 복스홀에 위치한 현대미술 갤러리로 데이미언 허스트가 자신의 방대한 컬렉션을 공개하기 위해 설립한 공공 미술 공간이다. 1913년 웨스트엔드시어터의 무대 배경을 제작하던 풍경화 스튜디오 건물을 개조해 조성했으며, 여섯 개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허스트의 작품뿐 아니라 그가 수집해 온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소개된다. 갤러리 입장은 무료이며, 내부에는 허스트의 〈약국〉 시리즈를 모티프로 한 카페 파머시2가 전시 기간에 맞춰 오픈, 운영된다.
- www.newportstreetgallery.com
- 대한항공은 인천 — 런던 직항 편을 주 7회 운항한다.
- 글. 최진이
- 사진. 작가 및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