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자리에서 오래의 시간까지, 노라 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 걷는 일과, 그 길을 오래도록 계속 걷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노라 노는 그 두 가지 시간을 모두 지나온 한국의 1세대 패션 디자이너다.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고, 한 시대의 스타일을 만들며, 한국 패션의 역사를 관통해 온 개척자. ‘처음’의 자리에서 ‘오래’의 시간까지, “성실이 쌓이면 혁신이 된다”고 말하는 디자이너 노라 노의 80여 년에 걸친 패션 여정을 따라가 본다.
First & Forever: 노라 노의 이름으로
최근 문화·예술 분야에서 1세대 여성 창작자와 개척자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와 직업의 영역에 등장하던 시기를 다시 살펴보며,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과 산업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는지를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6년,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쇼가 열렸고, 무대의 주인공은 디자이너 노라 노였다. 이 패션쇼는 단순히 새로운 옷을 선보이는 자리를 넘어, 맞춤옷 중심의 문화가 기성복을 소비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대적 상징이었다. 특히 사회로 나오기 시작한 여성들에게 ‘선택해 입는’ 기성복은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방식으로써의 옷이었다. 노라 노는 실용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디자인에, 당시 평론가가 ‘절제된 우아함’이라고 표현한 스타일을 선보이며 한국 패션산업의 형성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2026년 지금, 한국 패션 디자이너 1세대 노라 노의 백수(白壽)를 기념하는 전시 〈노라 노 Nora Noh: First & Forever〉(3.21~7.16)가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관 내 경운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 디자이너의 긴 생애를 돌아보는 회고전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패션이 시작되고 성장해 온 과정, 여성들의 삶과 사회적 역할이 변화해 온 시간을 함께 보여주는 복식사이자 문화사에 가까운 전시다. 기성복이라는 개념, 패션쇼라는 장면, 디자이너라는 직업 그리고 옷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생각까지.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한 사람의 시간과 열정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무르익었음을 보여준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노라 노를 한 분야의 길을 처음 연 사람 그리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해 온 창작자로서 살펴본다. 〈First & Forever〉라는 타이틀이 상징하듯 그녀가 처음 일을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이어온 그 시간은, 한 사람의 시간이자 한국 패션이 시작되고 자라난 시간이며 여성들의 삶의 방식이 변화해 온 시간이다.
디자이너의 시간
Q. 경운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선생님의 백수 기념 전시 제목은 〈First & Forever〉입니다. 선생님 인생을 ‘First’와 ‘Forever’라는 두 단어로 나눠본다면, 각각 어떤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First’는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처음 일을 시작했던 시간을, ‘Forever’는 그 일을 오랫동안 계속해 온 시간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2세와 3세가 함께 이어가는 일이 됐기 때문에 ‘노라 노’라는 이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Q.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시간이 하나의 전시로 정리된 것을 보니 한국 현대 복식의 역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특별한 일을 했다기보다 좋아서 한 일인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이 그 시절을 보여주는 자료가 됐더군요. 예전 고객들로부터 제가 디자인했던 옷 1000벌 이상을 기증받아 정리하고 있어요. 옷은 유행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 같지만, 막상 지나고 보면 그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옷을 제대로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는 복식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번 전시가 잘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Q. 요새도 스케치나 디자인을 하시나요?
요새는 체력도 떨어졌고, 예전처럼 일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요. 한 2~3년 전부터는 지난 자료 정리에 온 시간을 쏟고 있는데, 남은 시간에 비해 정리할 게 왜 이리 많은지. 게다가 2028년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로열온타리오박물관에서 한국 패션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에 참여하게 되어 그 자료도 정리하고 있어요. 이제 한국 패션도 하나의 역사가 되어 세계적인 박물관에서 다뤄지는 시기를 맞이한 것 같아 의미 있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양단 아리랑 드레스’가 2014년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어요.
제3회 미스코리아 진이었던 오현주 씨가 1959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나갈 때 만든 옷입니다. 그 대회에는 각 나라의 전통의상을 입는 순서가 있었는데, 한복을 전통적인 스타일 그대로 입고 나가면 세계 무대에서는 조금 약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적인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세계 무대에서 돋보일 수 있는 한복 드레스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한복의 선과 색 같은 한국적인 요소는 살리고 형태는 드레스로 디자인했는데, 그게 ‘양단 아리랑 드레스’예요. 그 옷이 그때 큰 주목을 받았고, 그 이후로 한국을 대표하는 드레스의 본보기처럼 남게 됐어요. 그런데 그 옷이 처음 나온 때로부터 70년 가까이 지난 최근에 BTS 컴백 프로젝트를 통해 대중에 다시 소개됐다고 하더라고요. 프로젝트의 테마가 ‘아리랑’이라서 잘 맞아떨어진 것 같습니다. 옷이란 것이 한 시대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 새로운 의미로 읽힐 수도 있음을 새삼 다시 느꼈습니다.
Q.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옷을 두고 “타임리스하다”고 말합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디자이너 입장에서 옷을 만든 게 아니라, 늘 고객의 입장에서 옷을 만들었어요. 옷은 작품이 아니라 사람이 입는 거니까. 입었을 때 편해야 하고, 오래 입을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바느질이나 단추 하나에도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썼어요. 제 오래된 고객들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 옷은 아무 때 입어도 ‘타임리스’다, 10~20년 된 옷도 여전히 입을 수 있다고 해요. 한 고객은 “노 여사 옷은 20년 됐는데도 단추 하나가 안 떨어져”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래 입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타임리스한 옷이 된 것 같아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이 점이 또 한 번 증명된 것 같습니다.
한국 여성을 위한 기성복의 시대를 열다
Q. 맞춤옷이 아닌 기성복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그 시대 여성들에게 옷은 어떤 의미였나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이미 기성복이 일반적인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 시절에는 한국 여성들이 직업을 갖는 경우가 흔치 않아서 옷도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녔죠. 그러다 해방 이후 외국 기업들이 들어오고 여성들이 직장을 갖기 시작하면서 외출과 사회 활동이 늘어났습니다. 당시에는 타이핑과 영어 회화가 가능하면 직장을 구했어요. 그러다 보니 여성들도 일할 때 입을 옷이 필요해졌습니다. 치마저고리 차림으로는 일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고, 맞춤옷은 가격이 비싸 누구나 입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간편하게 입을 수 있고, 직접 입어보고 선택해서 살 수 있는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가 내세웠던 캐치프레이즈가 ‘마음대로 입어보고 선택할 수 있는 옷’이었어요. 그것이 한국에도 필요한 새로운 옷의 방식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기성복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는 옷을 만들면서 여성들이 조금 더 당당해지기를 바랐습니다. 옷을 통해 자존심도 살리고 자신의 능력도 발휘하면서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Q. 선생님께서는 디자이너로서뿐 아니라 원단 개발과 해외시장 진출을 통해 한국 패션산업의 기반을 만드는 일도 해오셨습니다.
제가 패션 디자인을 시작했을 당시는 우리나라 1인당 GDP가 57달러였어요. 지금은 거의 4만 달러에 육박하죠.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패션은 도통 쓸모가 없더라고요. 패션 대신 의학을 공부했다면 훨씬 좋았겠다 생각했죠. 그때 마음의 상처라고 할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션 공부한 것을 후회했어요.
1956년 파리에서 6개월간의 패션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이탈리아에 들렀는데, 거기서 그 나라가 패션 강국이 된 건 섬유산업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대한민국을 위해 할 일이 생겼구나’ 했죠. 패션은 옷을 디자인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섬유가 있어야 옷이 만들어지고, 그러면 산업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직접 공장들을 찾아다니며 원단 개발을 함께했고, 해외시장에 한국 원단과 옷을 소개하는 일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결국 뉴욕 컬렉션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제 옷을 보고 처음에는 다들 유럽 디자이너 컬렉션인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한국 디자이너의 디자인에 한국산 원단까지, 모두 한국 것이라는 설명서를 읽고 놀라워했죠. 당시 저명한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퍼트리샤 셸턴 평론가는 신문에 ‘절제된 우아함’이 겸비된 옷이라고 대서특필해 줬습니다. 그때부터 자신감을 갖고 여러 일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성실과 겸손 그리고 장인이라는 이름
Q.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처음 걸으시고, 또 해보지 않은 일들을 계속 시작하고 이어오셨습니다. 그런 선택들을 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걸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늘 ‘건달 정신’으로 일한다고 이야기해요.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너무 계산을 많이 하기보다 그냥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잘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시작하기 전부터 꼭 성공해야 한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나라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그냥 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도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실패가 두려워서 시작을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너무 겁을 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한번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Q. 선생님의 “성실이 쌓이면 혁신이 된다, 에너지의 10%는 남겨둬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일을 해오시면서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자기 체력과 능력을 알고 10% 여유를 두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욕심내지 말고. 그게 장수의 비결이기도 해요. 제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일을 오래 하려면 욕심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해요. 사람은 능력과 체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걸 다 써버리면 결국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에너지의 10% 정도는 남겨두고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건강도 지킬 수 있고, 일도 오래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일을 계속하다 보면 그것이 쌓여 결국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Q. 지금 선생님의 작업을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기술이나 재료가 아닌 ‘태도’ 하나만 전한다면 무엇을 말해주고 싶으신가요?
젊은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겸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반드시 생깁니다. 저도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오며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Q. ‘길을 만든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저는 장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자기 일을 묵묵히 계속하는 사람, 장인 정신으로 일한 디자이너로 기억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노라 노 Nora Noh: First & Forever>
장소: 경운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경기여고 100주년 기념관)
기간: 3월 21일~7월 16일(일요일, 공휴일 휴관)
전시 해설: 월~토요일, 오후 2~3시
관람료: 무료
문의: 02-3463-1336
www.kwmuseum.org
- 글. 최진이
- 사진. 신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