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 June 2026 (Vol. 50 No. 03)

리처드 루브의 〈자연은 풍경이 아니라 경험이다〉

리처드 루브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해 온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자연을 단순한 환경이나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성장, 공동체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 깊이 연결된 존재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 〈Noticing: Intimate Encounters with the Natural World〉(2026)를 포함해 11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아이들과 자연을 다시 연결하기 위한 국제적 운동 단체인 ‘어린이와 자연 네트워크’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Last Child in the Woods〉(2005)를 통해 ‘자연 결핍 장애’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켰고, 이러한 공로로 2008년 미국 국립오듀본협회의 최고 권위 상인 오듀본 메달을 수상했다. 이번 글에서 그는 우리가 자연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감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묻는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자라던 존재였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교외의 끝자락에 살았다. 나는 뒷마당 울타리 너머로 이어지던 들판과 숲을 탐험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키 큰 옥수수밭 사이를 헤치며 달리면 나의 콜리 개, 배너가 앞서 달려가거나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부모님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가 많았지만, 배너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 나무껍질의 홈과 골짜기처럼 갈라진 틈 사이를 지나가는 진딧물과 개미들의 군락을 들여다봤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몇 시간이고 동쪽 하늘에 구름이 층층이 쌓여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고, 옆 나무에서 나를 건너보는 까마귀나 나무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배너를 쳐다보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과 놀라움이라는 감각을 양분 삼아 자라고 있었고, 나 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에 의해 품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운이 좋은 아이였다.

그러나 오늘날, 전자기기에 연결되고 인공지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화면 너머에 있는 세계의 신비를 알아차리는 아이와 어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나는 2005년에 쓴 〈Last Child in the Woods〉에서 ‘자연 결핍 장애’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그것은 공식적인 의학적 진단명이 아니라, 더 큰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처음 글을 쓸 때만 해도 관련 연구는 약 60여 편 정도로 많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일은 학계에서 크게 주목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이들의 인지와 정서, 신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연구만 1500편이 넘는다.

과학은 점점 더 분명하게, 우리가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사실들을 말해주고 있다. 자연은 아이들의 ADHD 증상을 완화하고, 우울과 불안을 줄이는 완충 역할을 하며, 비만과 근시를 예방하거나 줄이고, 면역력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사회적 유대감을 높이거나 지역사회의 폭력성을 낮추며, 창의성을 자극하고, 학업성취도를 높이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이제는 데이터가 이런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지는 중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Z세대 중 3분의 2가 며칠 동안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은 점점 더 실내에서 살아가는 종(種)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난 20여 년 동안 끊어진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변화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소아과의사들은 ‘자연 처방전(Nature Rx)’, 즉 자연 속에서 보내는 시간을 처방하기 시작했고, 학교들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운동장을 자연 놀이터와 정원으로 바꾸고 있다.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은 학교와 직장, 도시를 설계할 때 자연 친화적 요소를 더 많이 포함시키고 있으며, 이는 생산성과 창의성, 건강의 향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26년 3월, 환경심리학자들은 비영리 뉴스 매체 〈The Conversation〉을 통해 3만 8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및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브라질, 일본, 나이지리아, 독일, 인도네시아 등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도 자연과 깊이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높은 행복감을 느낀다는 공통점이 발견됐다.


그들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많은 사람이 자연을 갈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보여지는 흐름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외로움의 시대’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진짜(authenticity)’를 찾으려는 갈망 때문이다. 우리에게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시간이 찾아왔고, 그 시간은 우리가 한 가지 사실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부모들로부터 자기 집 마당에서 처음으로 야생동물을 보게 됐다는 이메일과 편지를 많이 받았다. 팬데믹 동안 사람들이 집 안에 머무르게 되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동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도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밤에 활동하기 때문에 주로 낮에 활동하는 인간과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동물을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플로리다주 뉴포트리치에 사는 나의 친구 미셸 윌리엄스는 연로한 어머니의 침실 창밖에 새 모이통을 달아뒀다. 참새, 박새, 비둘기들이 창가로 날아왔고, 어머니는 새들을 보며 위로받았다. 미셸은 내게 “신이 보내준 이 깃털 달린 존재들이 우리의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동물들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됐다고도 했다.

우리는 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걸까? 인간의 외로움은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 캠퍼스의 마이클 빈센트 매키니스 교수는 이를 ‘종(種)의 외로움’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상처 입은 풍경 속에서 느끼는 종의 외로움은 우리가 장소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현대의 인간은 서로 이어진 관계망을 다시 세우고 회복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개인으로서도 그리고 하나의 종으로서도 우리는 점점 더 고립돼 가고 있다. 격리의 시간을 겪기 전부터 보건 전문가들은 이미 인간 고립이 하나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고 경고해 왔다. 2018년의 한 연구는 가장 나이 많은 세대부터 가장 어린 세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더 큰 사회적 고립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숲을 떠올려 보면, 나는 그곳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한 번도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다. 물론 배너가 늘 함께했지만, 내가 느꼈을지도 모를 고립감은 나무와 풀, 구름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야생 생명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었다.

삶이 버겁고 위협적이며 예측할 수 없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생명에게 손을 내민다. 작가 짐 해리슨은 자신의 소설 속 한 인물의 내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시냇물이나 강은 그의 영혼의 결을 바꿔놓곤 했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 경이로움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매일의 일이었던 때처럼 그의 뇌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사라진 것은 숲이 아니라 감각이다

아주 오래전, 선사시대 조상들은 어린 시절부터 수백 가지 관찰 능력을 발달시켰다.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자세히 바라봐야만 했다. 그들은 곰과 브런치를 나누고 싶지 않았고, 독사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에게 그런 감각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그 감각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촉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이라는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은 잊어버리자. 지금 과학자들은 인간이 9~30가지 사이, 어쩌면 그 이상의 감각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상에서도, 정치에서도, 인터넷 검색에서도 ‘진짜’는 점점 더 희귀해지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진짜’를 갈망하는 이유일 것이다. 숲속에서 우리를 돌아보는 여우의 눈빛,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노랫 소리. 이처럼 우리가 보고, 듣고, 행하는 모든 순간들은 우리를 움직이는 더 큰 힘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일 수 있다.

깊이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많이 보는 것이 아니다. 더 오래 보고, 더 조용히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감각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우리가 사는 장소와 다른 생명들과 우리를 다시 연결해 준다. 과학을 밝히고, 더 나은 질문을 하게 만들며, 예술과 음악, 건축을 풍요롭게 한다. 연민과 공감 능력을 키워주기도 한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자연의 많은 부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면서도 여전히 숲과 들판에서, 시냇가와 사막 모래밭에서 위안을 얻고 있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나는 숲속 빈터에 혼자 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풀이 무리를 이뤄 자라는 습지가 있었다. 각각의 풀 무더기는 사자 한 마리만 한 크기였고, 사자의 갈기처럼 솟은 잎들이 공중으로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 식물의 진짜 이름을 몰라서 그것을 사자 풀이라고 불렀다. 발목 정도 깊이의 물속에 서서, 나는 그 풀 무더기 하나를 향해 몸을 뒤로 던졌다.

나는 마치 위로 던져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람에 들어 올려져,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큰 세계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세계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세계처럼 느껴졌다.

  • 글. 리처드 루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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