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여행하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2022년, 만 18세의 나이로 미국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을 거머쥔 임윤찬은 단숨에 신드롬을 일으키며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시대를 건너온 악보를 읽으며 스스로와 대화하고 침묵을 통해 감정을 고양시키는 그의 태도는 마치 음악이라는 길을 오랜 시간 홀로 걸어온 여행자의 모습 같다. 임윤찬이라는 예술가가 바라보는 세계 그리고 그가 걷고 있는 길로 잠시 여행을 떠나보자.
영혼과 자유를 담아내는 음악 여정
Q. 여행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지도 위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여행도 있고, 자신의 내면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여행도 있죠. 외부의 시선이나 기대가 아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차근차근 답을 하며 자신만의 감정과 언어를 찾아가는 길. 임윤찬 님의 음악은 바로 그런 여정을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임윤찬⎮ 저는 음을 하나씩 듣고 귀로 판단해 연주하는 건 연주 기술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음을 구현하는 것보다는, 온 영혼을 불어넣어 음악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보 외의 무언가를 그려내는 시적인 상상력과 용암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열정이 필요하죠. 저는 연주할 때나 연습할 때 첫 음의 소리에 집중합니다. 그 소리와 이야기가 심장을 강타하지 않으면 다음 음으로 넘어가지 않아요. 심장으로 다가오는 소리만이 저 자신에게 귀 기울일 자유를 주죠. 예술가란 궁극적으로 기술과 열정을 넘어서서 오로지 자유만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Q.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이후 세계 무대에서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낯선 도시, 낯선 청중과의 만남은 임윤찬 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임윤찬⎮ 여행은 자유로움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새로운 것들과 교류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죠. 도시든 청중이든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건, 이 작은 행성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즐거움일 거예요. 저는 더 많은 나라와 도시를 오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경험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 만큼 직업적으로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며 삶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에 굉장히 큰 감사를 느낍니다. 한편으로는 넓어진 무대만큼이나 저만의 이야기를 더 정교하게 구축해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심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Q. 청중도 그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임윤찬 님의 연주에는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음악 외에 당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임윤찬⎮ 다른 장르의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을 때도 많고 그것이 분명 도움 되지만, 제게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들이 가장 깊은 영감을 줍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통해 세상을 마주해 왔습니다. 일곱 살 나이에 다른 친구들은 태권도장을 다닐 때 저는 상가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기술적으로 배우겠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학원에 가서 무작정 피아노를 마주했죠. 어쩌면 그 시절의 기억과 감정들이, 머리보다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깊이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스스로 깨닫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는 아직도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려고 합니다.
Q. 무대 위에 섰을 때 청중과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의 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리고 연주자와 청중의 이상적인 관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임윤찬⎮ 저는 솔직히 청중과 연주자 사이에 경계가 없던 수백 년 전의 옛 시대가 그립습니다.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 자체가 당연히 연주자와 청중으로 역할을 나누긴 하지만,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사람과 객석에서 듣는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연주의 순간, 음악을 함께 향유하는 하나의 공동체적인 관계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음악가를 직업인으로서 바라보는 인식이 크다 보니 무대 위에 서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바 역시 커지는 듯해요. 그게 부담스러워서인지, 현재의 공연 문화 속 삶을 사는 저도 가끔씩 지나간 옛 시대를 부러워하곤 합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는 음악의 본질을 무대에 더 불어넣고 싶습니다.
성장과 재창조
Q.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예술가로서의 사유 이면에는 끊임없는 시도와 노력도 수반되는 것 같습니다. 음악가로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예술가에게 ‘성장’은 어떤 과정이라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임윤찬⎮ 한 사람의 예술가에게 ‘성장한다’는 말은 ‘어제의 나’, 즉 기존의 나를 깨부수고 새로운 나를 재창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예술가는 모든 감각의 탈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는 자로 거듭나야 한다.” 랭보에게 예술적 영감은 온전히 자아를 해체하고 고통을 통과한 뒤에야 얻어지는 산물이었죠. 예술가라면 그렇게 ‘의식의 탈선’을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나를 부수고 ‘새로운 나’를 찾는 과정 중에 고통을 느낄지라도, 그 의도적인 파괴를 통해 ‘새로운 나’에게 다가가며 만날 행복감과 고통을 다 끌어안아야만 어제의 예술가를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할 수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함께해 온 임윤찬 님에게 ‘꾸준함’과 ‘몰입’은 어떤 의미인가요? 예술이 아닌 삶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임윤찬⎮ 저는 흔들리지 않는 집념의 정신이 예술가의 심장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있듯이, 설령 이 세상에 죄악과 속임수만 남는다고 해도 희망과 자기 신념을 지켜나가려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예술가의 심장,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삶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성장도 이뤄지지 않을까요?
한국인을 넘어
Q. 한국인이라는 뿌리는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임윤찬 님의 연주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요?
임윤찬⎮ 한국인은 ‘한’을 노래하는, ‘한’을 노래할 줄 아는 자질과 영혼을 가진 민족입니다. 특히 예술이라는 분야에서는 이러한 영적 유전자가 주는 힘이 크고 중요하다는 걸 항상 느낍니다. 저는 그런 자질을 물려받은 한국인으로서 이를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감사히 주어진 것과 별개로 예술가라면 그간 자신이 젖어 있던 가장 익숙한 통로에서 벗어나 또다시 낯선 자아로 나아가는 과정을 찾는 일에도 소홀해서는 안 되겠죠. 저를 한국인에만 가두지 않고 그 너머의 인간 임윤찬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하려 합니다.
Q. 곧 선보일 공연이나 프로젝트, 계획 중인 활동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임윤찬⎮ 지난 10월에는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협연,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의 리사이틀 등 미주 지역 공연을 마쳤고, 지금은 다가오는 일정들을 준비 중입니다. 12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다니엘 하딩의 지휘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예정돼 있으니 한국 무대에서도 만나뵙기를 고대합니다. 이후에는 아시아 투어를 통해 다양한 아시아권 국가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2026년 1월에는 암스테르담과 도르트문트에서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와의 협연이 계획돼 있으며, 4월에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리사이틀을 갖습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임윤찬이 아닌, 앞으로의 임윤찬은 어떤 모습일까요?
임윤찬⎮ 지금까지의 저는 오로지 음악에 몸을 던지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땅 위에 머무른 채 삶과 세상을 살피면서 살고 싶습니다. 스무 겹의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듣는 사람들의 영혼을 깊이 파고드는 노래, 제 영혼이 그 노래 안에 존재할 겁니다.
- 사진. 김신중 / M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