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 세계를 잇는 맛의 언어
발효는 요즘 K-푸드의 가장 흥미로운 장르다. 보존의 지혜에서 출발한 전통이 셰프들의 창의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며, 글로벌 미식 언어 속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맛은 단순한 미각 경험을 넘어 한 사회의 역사와 문화, 환경적 조건을 반영하는 총체적 언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맛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는 ‘발효’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발효는 단순한 조리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시간의 흐름을 재료 삼아 감칠맛과 깊이를 빚어내는 문화적 행위다. 장을 비롯한 다양한 발효식은 기다림과 순리를 중시하는 한국적 세계관을 담고 있으며, 비움과 숙성의 과정을 통해 맛의 깊이와 함께 삶의 미감을 완성한다.
땅과 바다가 빚은 발효의 유산
발효의 역사는 한국인의 인내와 맞닿아 있다. 한반도의 대부분은 산지로 이루어져 경작지가 넉넉지 않았고, 그중 벼농사가 가능한 땅은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고기는 부유층 아니면 제례와 같은 특별한 의식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가축을 도축하는 대신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이나 산과 들에서 채취한 나물,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콩을 주요 단백질 공급원으로 삼게 됐다. 한국의 대표적인 발효 식품인 장의 원리는 단순하다. 콩, 소금, 물, 이 세 가지가 시간과 미생물, 그리고 사람의 손길을 만나서 특별한 맛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탄생한 간장과 된장은 궁핍한 시절의 지혜이자 자연과의 공존을 상징했다. 장은 한국 음식의 뿌리이자 그 구수한 맛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한민족의 식탁을 지탱하는 정신으로 이어져 온다.
이 같은 발효의 세계는 땅에서 그치지 않는다. 내륙의 장이 땅의 기운에서 태어났다면, 바다의 젓갈은 파도의 숨결에서 솟아났다. 남해와 서해 연안에서는 새우젓, 멸치젓, 황석어젓처럼 다양한 젓갈 문화가 발달했다. 짠맛 속에 감도는 깊은 풍미는 단순한 저장 기능을 넘어 다채로운 바다의 생명력을 농축한 또 하나의 발효 미학이다.
궁핍했던 시대에 발효는 생존의 기술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자연의 리듬과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낸 문화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집집마다 이어온 발효의 유산
한국 음식 문화에서 발효는 오랫동안 집집마다 이어지는 생활 속의 지혜였다. 사람들은 메주를 쑤고 이를 오랜 시간 옹기 속에서 발효시키는 집안의 방식을 대대로 고수하며 가보처럼 지켜왔다. 시골 마을이든 도시의 마당이든, 장독대에 줄지어 선 옹기 속 발효의 과정은 사계절의 숨결을 품고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발효의 여정은 메주에서 시작된다. 삶은 콩을 찧어 단단한 벽돌 모양으로 빚은 뒤 짚으로 묶어 매달아 두면,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찾아와 생명을 불어넣는다. 겨울바람에 말린 메주는 소금물에 잠기고, 시간과 자연의 손길 속에서 서서히 간장과 된장으로 변신한다. 그 맛은 집집마다 다르다. 발효 과정을 지키는 이의 손맛, 지역의 기후 그리고 미생물과 효모가 어우러져 집집마다 고유한 풍미를 완성한다.
오늘날 대량생산이 전통적인 발효 방식을 상당 부분 대체했지만, 옹기 속에서 익어가는 동안을 지켜보는 인내의 시간과 정성, 인간의 지혜와 자연의 호흡이 나누는 은밀한 대화는 4000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 발효 문화의 가장 의미있는 유산이다.
무한한 확장성을 간직한 발효
한국 사찰음식에는 발효의 미학이 응축돼 있다. 발효를 기다리는 일 자체가 수행이며, 서두름 없이 계절이 흐르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긴 시간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장은 인내와 비움의 상징이다. 사찰음식은 ‘자연 그대로’, ‘몸을 해치지 않는 조화’를 중요시하기에 육류와 생선을 사용하지 않으며, 마늘과 파, 부추, 달래와 같은 오신채를 배제한다. 그렇기에 음식에 깊은 맛을 더하기 위한 장맛은 곧 사찰음식의 뿌리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 부산 2025〉에서 국내 유일하게 3스타를 받은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는 정관 스님을 스승으로 모신다. 정관 스님을 만난 뒤로 피아노 건반 가운데 ‘도’만 연주하다가 이제는 88개의 건반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는 요리할 때 좋은 장을 잘 활용하면 복잡한 기술이 필요 없어진다고 덧붙인다. 또한 다양하고 복잡미묘한 맛을 지닌 장은 다양한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무한한 확장성을 품고 있다. 2024년 11월에 큰 기대를 모으며 오픈한 한식 레스토랑 ‘비움’에서는 김대천 셰프가 수년간 쌓아온 한식과 사찰음식 수련의 결과물을 담아낸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5〉에서 2스타를 받은 ‘에빗’은 호주 출신 조셉 리저우드 셰프가 메주를 활용한 한 입 거리 음식 ‘메주 도넛’을 통해 한국 발효 문화를 향한 사랑과 헌사를 표한다. 발효 기반의 바 페르마타 서울에서는 클래식 칵테일 블러드 메리를 비틀어 타바스코 소스 대신 고추장으로 특유의 매콤한 맛을 냈다.
세계인의 식탁 위에 오른 발효의 맛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외에서의 한국 레스토랑은 대도시 한인 타운에 한정된 풍경이었다. 이곳은 한국 이민자들이 고향의 맛을 그리며 찾는 곳이었지만, 주류 미식계의 주목은 좀처럼 받지 못했다. 오늘날 그 변화는 눈부시다. 뉴욕만 해도 〈미쉐린 가이드〉 스타를 받은 한식 레스토랑이 12곳에 달하며, 에릭 킴(셰프이자 음식 작가)의 ‘고추장 버터 누들’이나 된장찌개 같은 장 기반 레시피가 〈뉴욕 타임스〉 지면에 정기적으로 소개된다.
한식 레스토랑의 영역을 넘어 장은 이미 미국·프랑스·멕시코 요리의 메뉴판에도 스며들었다. 전 세계를 휩쓴 K-BBQ와 한국식 치킨의 매혹 이면에는 간장과 고추장으로 완성된 양념장이 자리하고 있다. 해외 마트의 진열대에는 K-BBQ 맛 스낵, 고추장 쿠키는 물론 현지 재료와 한국 발효의 미학을 접목한 하이브리드 소스들이 즐비하다. 한때 특정 문화의 상징에 머물던 장은 이제 국경을 넘어서 다채로운 영감을 제공하는 세계적 뮤즈로 자리잡고 있다.
장을 맛본다는 것은 곧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맛본다는 의미다. 된장찌개 한 숟가락에는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온 농경사회의 검소함이 깃들어 있다. 고추장 떡볶이 한 접시에는 현대 길거리 음식 문화의 활기가 담겨 있다. 간장불고기 한 입에서는 달고 짭짤하며 감칠맛이 조화를 이루는 현대적 세련미를 느낄 수 있다.
레스토랑의 주방 그리고 전 세계 슈퍼마켓의 푸드 진열대에 이르기까지, 발효는 끊임없이 진화하며 한국의 혼을 한 입 한 입에 실어 나르고 있다. 발효는 한국인의 식탁 위에서 단순한 조리법을 넘어, 역사와 지혜 그리고 삶의 방식을 담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발효 문화는 한국 음식 세계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근간이자, 한국인의 입맛 속에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이다.
- 나디아 조는 한국 음식을 미국에 알리는 ‘정 컬쳐 앤 커뮤니케이션’의 창립자다. 넷플릭스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의 ‘정관 스님’ 에피소드를 제작했고, 〈장: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빚어낸 미식의 세계〉의 공동 저자이며, 각종 언론에서 한국 음식 콘텐츠를 소개하고 있다.
- 글. 나디아 조
- 에디터. 양연주
- 사찰음식. 법송스님
- 사진. 신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