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 December 2026 (Vol. 50 No. 06)

달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

<모닝캄>은 일상의 풍경에서 길어 올린 생각을 ‘옴니버스 스토리’를 통해 전합니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들이 독자의 여정 속에 작은 생각 하나로 머물렀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꽃피우기를 바랍니다.

  • 김연수는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시간과 기억, 사랑과 관계를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풀어낸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토록 평범한 미래〉 등을 썼으며, 〈여행할 권리〉, 〈언젠가, 아마도〉 등 여행과 일상을 기록한 산문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최근에는 예술과 삶,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담은 신작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펴냈다.

J.M.W. Turner, The Fighting Teme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1838,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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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나는 경남 창원의 웅천왜성이라는 곳에 갔다. 왜성이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병이 지은 일본식 성을 말한다. 남해안 일대에 그런 왜성 유적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어두운 유산이기에 왜성들은 잘 알려지지도, 관리되지도 못하는 사이, 폐허가 됐다. 입구에는 초소가 있어 방문자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했다. 이름을 적으며 살펴보니 방문자는 거의 일본인들이었다. 초소를 지나 산길을 따라 중턱쯤 올라가니 석축의 흔적이 보였다. 풀숲에 반쯤 파묻힌 그 석축의 끝에는 고구치(성의 출입구)가 아니었을까 싶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일본식 성의 중심 공간인 혼마루가 나온다. 폐허에서는 모든 것을 상상해야만 한다. 거기에는 한때 천수각을 비롯해 많은 건물이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자갈들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오래전, 전쟁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그들이 언제 울고 언제 웃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다만 웅천왜성 한쪽에 선 작은 목비만이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 뿐. 목비에는 거기가 한국 천주교 첫 미사를 지낸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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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593년 겨울, 한반도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병 중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병사들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다이묘를 따라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한 해 전, 조선을 침략한 이후 그들은 미사를 지낸 적이 없었으므로 고니시는 일본에 들어와 있던 예수회에 신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수회에서는 스페인 출신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조선으로 보냈다. 당시 일본의 지배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럽인이 한반도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신부는 고니시의 군대가 주둔하던 웅천왜성으로 몰래 들어와 천수각에 숨어 지냈다. 그는 어두워진 후에야 성 아래 병사들의 거처로 내려가 고해성사를 행했다. 웅천왜성의 작은 목비에 적힌 한 줄은 이 사연을 담고 있었다. 침략군을 따라 들어온 종군 신부의 활동을 기릴 수 있느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다음 이야기가 나는 궁금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체류 사실이 발각되면서 세스페데스 신부는 1년여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귀로에 그는 쓰시마섬에 들러 고니시의 딸 마리아를 만났다. 그녀는 섬을 지배하던 도주의 아내로, 훗날 집안이 몰락하고 쓰시마섬에서 쫓겨난 뒤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런 신심을 바탕으로 마리아는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 고아들을 돌봤다고 한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찾아왔을 때, 영민한 조선 아이들이 있다며 두 소년을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 예수회 사제의 편지에는 그 두 소년의 아버지가 조선 왕실의 충실한 신하였다고 적혀 있다. 내 눈에는 세스페데스 신부를 만난 마리아가 두 소년을 부르자 그들이 쭈뼛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두 소년이 형제로 보였다. 나는 그 소년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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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건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이었다. 그해 봄, 나는 다니던 잡지사에서 나왔다. 왜 퇴사하느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월드컵 경기를 마음껏 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본심은 소설에 있었다. 내게는 꼭 쓰고 싶은 소설이 하나 있었다. 내가 소설가가 된 건 대학생 때였다. 문학상 공모에 제출한 장편소설이 당선되며 첫 책이 출간됐다. 떠들썩한 데뷔에 비해 3년 뒤 내놓은 두 번째 장편소설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실망한 나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월간지 기자로 잡지사에 취직했다. 매달 돌아오는 마감을 지키기 위해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게 되면서 소설가의 꿈은 점점 멀어졌다. 몇 년이 지나자 나를 소설가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출판 전문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출판사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공익 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한국에서 출판되는 모든 책이 매주 두 번씩 편집부로 배달됐다. 편집장은 다음 호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책을 골라낸 뒤 나머지 책들은 바닥에 쌓아뒀다.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책이 있었다. 기사를 쓰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나는 바닥에 쌓인 책들을 한 권씩 들춰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 더미를 보니, 대한제국 시기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들의 기록을 담은 총서가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책에는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19세기 말 한국의 모습이 재미있게 묘사돼 있었다. “서울의 혼잡한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서양의 도로에서처럼 정통으로, 또는 비스듬히 팔꿈치로 다른 사람을 치면서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라거나 “20만 명이 사는 도시에서 듣는 개구리 소리라니! 하나 더 있다면 아낙네들이 다음 날 바깥주인의 외출을 위해 두루마기를 다듬이질할 때 들리는 소리뿐이다” 등등.

그러다가 나는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1593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스페인의 신부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고니시 부대의 종군 신부로 웅천에 도착해 고아들을 구제했다.” 나는 “고아들”이라고 중얼거렸다. 고아들, 임진왜란의 고아들. 만트라를 중얼거리듯이 나는 읊조렸다. 그러자 꿈을 꾸는 것처럼 그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해졌다. 고아들, 임진왜란의 고아들. 중얼거릴수록 그들의 이야기는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듯 내 안에서 또렷해졌다. 마음의 눈으로는 그 이야기가 똑똑히 보였지만 어떻게 하면 그 이야기를 쓸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마치 에베레스트산 정상 사진을 눈으로 보면서도 어떻게 하면 거기까지 올라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처럼. 그 뒤로 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서서히 마음의 눈으로는 분명하게 보고 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길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꿈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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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찾아간 곳은 세스페데스 신부의 출발지인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였다. 그의 인생 역정을 따라 나는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이어 그의 부친이 시장으로 일했던 마드리드와 그가 예수회에 가입하고 동방 전도를 꿈꾸게 된 살라망카를 거쳐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향했다. 살라망카에서 아침에 출발한 국제 버스는 해가 저문 뒤에야 나를 리스본에 내려놓았다. 리스본에서는 매일 국립도서관에 갔다. 포르투갈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거기에는 대항해시대를 연구한 찰스 복서의 영문 책이 소장돼 있었다. 책은 흥미로웠지만 책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나는 세스페데스 신부의 흔적을 찾아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중 하나가 상로케 성당이었다. 1755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그때까지의 리스본은 거의 파괴됐지만, 상로케 성당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16세기 후반, 리스본에 도착한 젊은 예수회 사제들은 막 건축된 상로케 성당에 딸린 수도원에서 그들이 수행할 임무와 관련해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지금도 성당에 보관돼 있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 앞선 선교사들의 유해와 유품을 보며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순명하는 훈련을 비롯해 선교지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배웠다. 그중에는 오랜 항해를 견디기 위한 기술도 있었다. 그들의 첫 시험대가 적도를 지나 희망봉을 돈 뒤, 고아와 말라카와 마카오를 거쳐 최종적으로 나가사키에 이르는 긴 항해였기 때문이다. 당시 범선으로 리스본에서 나가사키까지 가는 데는 꼬박 2년이 걸렸다. 돌아오는 데는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상로케 성당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던, 세스페데스 신부를 비롯한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예수회 사제들은 자신들이 살아서 리스본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돌아오지 못하는 우주선에 올라타는 우주비행사와 같다. 그 여행이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펼치리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배에 올라탈 수 없었으리라.

리스본의 서쪽 지역인 벨렝은 훈련을 마친 예수회 신부들이 마침내 동양으로 떠나는 배에 올라탔던 곳이다. 강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대서양이라 해 질 녘 풍경이 아름답다. 저녁이 다가오면 많은 관광객이 노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데, 그때 빠지지 않는 곳이 발견 기념비이다. 이 탑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가는 새 항로 개척에 기틀을 마련한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 서거 500주년을 맞아 탐험가들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그러니 이 탑은 성공한 탐험가만을 위한 탑이 아니다. 중동의 이슬람 세력에 막혀 동양으로 가지 못하던 유럽인들이 인도 항로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데에는 성공한 탐험가보다는 실패한 탐험가들의 공이 더 크다. 실패한 탐험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엔히크 왕자다. 그는 수많은 배를 아프리카 남쪽으로 보냈음에도 희망봉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 꿈은 다음 세대에 이르러 실현됐다. 그렇다면 엔히크 왕자의 꿈은 이뤄지지 않은 것일까, 이뤄진 것일까? 내가 없는 세계에서 이뤄지는 꿈이 있다. 발견 기념비는 그런 꿈을 꾸는 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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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어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나는 벨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웅천왜성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세스페데스 신부가 떠나온 리스본을 상상했을 때, 그곳은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세계의 끝처럼 느껴졌었다. 바로 그곳에 내가 와 있다고 생각하자 마침내 끝까지 왔다는 만족감과 함께 여행자의 향수가 밀려들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세계의 끝까지 갔다지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머나먼 곳까지 온 것일까? 그러자 흩어진 구름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봉우리처럼 그 꿈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의 희망봉은 소설이었다. 오래전, 서울에서 태어난 형제가 부모를 잃은 뒤, 끔찍한 전쟁에 휘말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세상의 끝처럼 머나먼 나가사키까지 가게 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두 형제는 어떤 꿈, 그러니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건 다시 바다를 건너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세계의 끝에서도 그들은 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처럼 나도 나의 꿈을 바라봤다. 나는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벨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때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러 온 사람들답게 그 목소리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친 하루가 끝나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취해갈 생각에 들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자 거기까지 가는 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시원한 강바람이 불었고, 강 건너 먼 불빛들이 흔들렸고, 눈물이 나왔다. 느닷없는 눈물이었지만 나는 그냥 내버려뒀다. 그때쯤에는 어차피 주위가 어두워져 지나가던 관광객들 중에 내가 우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꿈을 10년도 넘게 붙들고 있다는 게 참 외롭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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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달을 바라보는 그 순간, 모두가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다. 달은 나만의 것인 동시에 모두의 것이다. 어떤 꿈은 그 달을 닮았다. 엔히크 왕자의 희망봉은 달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소설로 쓰려고 했던 두 형제도 그런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델은 고니시 마리아가 세스페데스 신부에게 소개한 두 소년이다. 그중 나이 많은 소년의 행적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그의 성은 권씨이며 세례명은 빈첸시오다. 권빈첸시오는 1580년 경 서울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으로 왜군의 포로가 됐을 때, 그의 나이는 열두 살에서 열세 살쯤이었다. 쓰시마섬에 있다가 세스페데스 신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예수회 신학교를 졸업한 뒤 세례를 받고 수사가 됐다. 1612년 그는 예수회 관구장에게 조선 선교의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임진왜란 이후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명나라가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가운데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권빈첸시오의 삶은 폭풍우 속 조각배처럼 시대의 거친 풍파에 휩쓸렸다.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꿈도 난파선의 돛대처럼 꺾이고 만다. 그렇게 상황이 여의치 않자 그는 1620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예수회 신부들을 추방하고 금교령을 내리며 혹독한 박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권빈첸시오는 점점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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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가사키에 간 건 2015년의 일이었다. 그게 벌써 10여 년 전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나가사키에 가서 반년 동안 머물렀던 이유는 역시 소년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 뒤로 나는 열 살이나 더 먹었는데, 아직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다. 처음 소년들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부터 따지자면 25년도 더 지났다. 과연 나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나가사키에 머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찾아간 곳은 나가사키역 근처에 있는 니시자카 언덕이었다. 천주교 박해 시기에 니시자카 언덕은 배교를 거부하던 신자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곳이었다. 나가사키는 한때 예수회가 관할하던 항구였기에 본보기로 삼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그 자리는 첫 순교자들의 숫자에서 따온 ‘일본 26 성인 순교 기념비’와 ‘일본 26 성인 기념 성당’이 들어선 공원으로 바뀌었다. 바로 거기에서 조선 입국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권빈첸시오 또한 처형됐다. 그는 시마바라반도에서 숨어 지내며 전도를 계속하다가 1625년 체포돼 이듬해 니시자카 언덕에서 화형을 당했다.

니시자카 언덕을 올라갈 때마다 나는 달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을 생각했다. 우리가 달까지 걸어갈 수는 없겠지만, 달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꿈을 이룰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듯이 살아갈 수는 있다. 니시자카 언덕에서 화형을 당했으니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던 권빈첸시오의 꿈은 결국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는 동안 그는 조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인 양 살았다. 미래에 일어날 일은 그의 현재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니시자카 언덕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일만을 선택할 수 있다. 과거나 미래의 일들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달을 바라보느냐 바라보지 않느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평생 권빈첸시오는 그 달을 바라보며 살았다. 달을 바라보며 살아온 한평생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달이 있을 것이다. 그 달까지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그 달을 바라보든지 바라보지 않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달이 보인다면 달까지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걸어갈 수 있다. 아직까지도 그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 소설을 쓰게 될 사람인 것처럼 이 글을 썼다. 사실은 오래전, 소년들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 글.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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