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 December 2026 (Vol. 50 No. 06)

오늘의 히로시마

전후 여든 해를 지나며, 히로시마는 느리지만 단단하게 제 풍경을 다시 써왔다. 쓰레기 소각장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되었고, 오래된 빌딩은 새로운 쓰임을 얻었다. 세토내해를 바라보는 미술관에서 깊은 산속 계곡까지, 도시 곳곳에 남은 시간의 흔적을 따라 오늘의 히로시마를 만난다.


© SIMOSE

시모세 미술관

풍경 위에 떠 있는 미술관

잔잔한 수면 위로 알록달록한 컨테이너 여덟 개가 떠 있는 듯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 세토내해를 마주 보는 고요한 해안에 자리한 시모세 미술관은 주변 풍경에 녹아든 건축 자체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건축가 반 시게루가 ‘예술 속에서 예술을 감상한다’는 콘셉트 아래 세토내해의 섬들을 모티프 삼아 설계했다. 전시실은 물의 부력을 이용해 움직일 수 있는 구조여서 계절과 전시에 따라 배치를 달리하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방식으로 유네스코 본부가 수여하는 건축상인 ‘베르사유상’을 받기도 했다.

미술관 내에는 프랑스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공예가 에밀 갈레의 작품을 비롯해 서양미술과 일본화, 공예, 히나 인형까지 폭넓은 컬렉션이 자리한다. 날이 좋다면 ‘에밀 갈레의 정원’에도 발길을 옮겨보자. 식물학자이기도 했던 갈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도록 계절마다 다양한 식물이 피고 진다. 전망대인 ‘보요 테라스’에 서면 세토내해를 수놓은 섬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미나모아 쇼핑몰

도시의 새로운 관문

2025년 3월, JR 히로시마역과 곧바로 이어지는 복합상업시설이 문을 열었다. 쇼핑과 레스토랑, 영화관 등 약 220개 상점이 모인 미나모아 쇼핑몰은 히로시마의 새로운 관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름은 시내를 가로지르는 여러 강의 수면(minamo)에서 따왔다. 벽과 천장에는 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가 이어지고, 외벽에서는 평화를 상징하는 종이학 모티프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히로시마의 명물인 노면전차가 건물 2층으로 직접 진입한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전차에 올라 도시 곳곳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여행이 된다. 3층 ‘간기 테라스’에서는 노면전차가 오가는 승강장을 느긋하게 내려다볼 수 있고, 7층 ‘우드 덱 광장’과 ‘대계단’에서는 히로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나카 소각장

쓰레기 소각장을 건축으로 바꾸다

히로시마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쓰레기 소각장’이라 불리는 시설이 있다. 뉴욕현대미술관(모마) 신관과 도쿄국립박물관 호류지 보물관 등을 설계한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의 작품이다. 이 건축의 특별함은 ‘쓰레기 소각’이라는 기능을 감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통유리 설계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서, 건물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보행로를 따라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드라이브 마이 카〉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원폭 돔과 위령비를 잇는 ‘평화의 축선’을 가로막지 않고 바다까지 이어지도록 건물 중앙을 비워두었다는 뒷이야기도 이 공간에 특별한 의미를 더한다. 곧게 뻗은 통로 끝에서 바다가 열리는 순간, 쓰레기 소각장이라는 시설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산단쿄 협곡

깊은 계곡에 남은 시간

시내에서 차로 약 1시간, ‘히로시마의 비경’이라 불리는 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총 길이 약 16km에 이르는 장대한 협곡으로, 국가 특별 명승으로 지정된 곳이다.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물길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져 하이킹 초보자나 당일 여행자도 부담 없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한때는 임업에 종사하던 이들조차 발을 들이지 않을 만큼 험준한 골짜기였지만, 1917년 사진작가 구마 난포가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구로부치, 사루토비, 니단다키, 산단다키, 미쓰타키는 ‘5대 장관’으로 꼽히는 대표 명소다. 여기에 ‘늑대 바위’ 오카미이시와 다타라 제철의 흔적인 숯가마 터 등 이야기를 품은 장소도 곳곳에 남아 있다. 자연과 더불어 계곡이 간직한 시간과 이야기를 하나씩 찾아가는 것도 협곡을 즐기는 방법이다.


히로시마 오리즈루 타워

바람이 통과하는 전망

1978년 지어진 사무용 빌딩을 2016년 전면 개보수해 새롭게 태어난 건축물이다. 설계는 세토내해 일대를 무대로 다양한 작업을 선보여온 건축가 산부이치 히로시가 맡았다. 이곳의 백미는 옥상 전망대 ‘히로시마의 언덕’이다. 바닥과 기둥, 천장을 목재로 짜고 사방을 메시 와이어로 둘러 활짝 열어둔 공간이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대로 스친다. 눈앞으로 원폭 돔과 평화기념공원이 펼쳐지고, 맑은 날에는 멀리 미야지마섬까지 시야에 담긴다. 12층 ‘오리즈루 광장’에서는 직접 접은 종이학을 건물의 상징인 ‘오리즈루의 벽’에 떨어뜨리는 체험도 할 수 있다.


  • 글. 에자와 가오리
  • 에자와 가오리는 여행과 음식, 공예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잡지와 서적, 웹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는 자유 기고가다. 지역의 식문화와 향토 음식, 민예와 공예를 폭넓게 취재하며 생산자와 장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 대한항공은 인천 — 히로시마 직항 편을
    12월 23일부터 주 7회 운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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