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 December 2026 (Vol. 50 No. 06)

손끝의 항법, 페이커

케이블 등을 이용한 기계적 제어 대신 전기신호와 컴퓨터로 항공기를 조종하는 플라이 바이 와이어(Fly-by-Wire, FBW). 흔들림 없는 비행은 실제 흔들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매 순간의 미세한 보정에서 나온다. 13년째 한 팀에서 활동하며 정상 궤도를 지켜온 ‘페이커’ 이상혁도 그렇다. 스스로 단단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흔들릴 때마다 일기를 쓰고 명상을 하며 방향을 바로잡는다. 아시안게임 2연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어느 날, 손끝으로 쉼 없이 궤도를 바로잡으며 정상을 지켜온 그와 마주 앉았다.

오래 정상에 머무는 법

Q.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대표팀이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이 자리에 오셨는데요, 두 번째 금메달은 어떤 기분으로 다가왔나요?

이번 대회에서는 무엇보다 금메달이 가장 큰 목표였어요. 그 목표를 이뤘고, 그 과정에서 모두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정말 뿌듯합니다. 금메달이 확정되고 팬분들과 동료 선수들, 함께한 팀원들이 다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굉장히 기뻤어요.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만든 결과라서 더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Q. 13년 넘게 한 무대에서 정상권을 지켜왔습니다. 지금도 매일 게임 앞에 앉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처음 시작할 때의 이유와 여전히 같은가요?

게임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다만 게임을 하는 이유는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그저 게임이 좋고, 이기는 게 좋아서 경기를 했어요. 지금은 팬분들, 팀원들과 함께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일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게 느껴져요. 그러면서 마음가짐도 많이 바뀌었죠. 13년 전과 비교하면 e스포츠라는 판이 몰라보게 성장했고, 저를 둘러싼 환경도 많이 달라졌어요. 그 변화와 함께 저도 조금씩 달라져 온 것 같습니다.

Q. 축구에서는 한 클럽에서 오래 뛰는 선수를 ‘원클럽맨’이라 부르죠. 팀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e스포츠계에서 한 팀에 13년을 머문다는 건 무척 드문 일입니다.

맞아요.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종목이 시작된 지 이제 15년 남짓이고, 그사이 수많은 팀이 생겼다가 사라졌어요. 한 팀에 이렇게 오래 소속돼 있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저도 잘 알아요. 제가 몸담고 있는 T1은 e스포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명문 구단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팀이기에 제가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시간을 팬분들이 함께 지켜보며 더 많이 좋아해 주시니, 저에게는 그게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Q. 어느 순간부터 ‘페이커’라는 이름은 경쟁자가 아니라 기준이 됐습니다. 누군가의 기준이 된다는 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그렇게 봐주신다는 건 저에게 굉장히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이에요. 경기에서 좋은 모습,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이미지가 생기면 그만큼 더 많은 메시지와 영향력, 영감을 전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책임감도 훨씬 크게 느끼고요. 동시에 그 자리가 저를 또 성장하게 만드는 기회가 되기도 해서 저에게는 무척 뜻깊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다시 방향을 잡는다

Q. 단순히 ‘잘한다’보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인상이 더 강한 선수입니다. 그 단단함을 위해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하게 지켜온 원칙이 있을까요?

사실 저는 그렇게 단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생각보다 이것저것에 많이 휘둘리는 편입니다. 감정적으로 차분한 건 어릴 때부터 타고난 기질에 가깝지만, 그것 말고는 저도 똑같이 흔들려요. 경기를 하다 보면 멘털을 다잡아야 할 때도 있고, 부진에서 스스로 빠져나와야 할 때도 있죠. 좋은 퍼포먼스를 계속 유지하는 과정에는 늘 크고 작은 부침이 따라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프로 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대해 많이 공부하게 됐어요. 이것저것 찾아보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도 고민하면서요. 제가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받아들이고 배우려 했던 것 같아요.

Q. 최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꾸준히 하는 일이 있다면요?

올해는 스스로 마인드셋이 좋지 않다고 느꼈어요. 뭔가 단단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요즘은 일기를 많이 쓰고 있어요. 감정적으로 휘둘릴 때가 많다 보니, 그럴 때는 그 감정을 글로써 내려가거나 스스로 목표를 새로 세워보려고 노력해요. 흔들리는 마음을 한번 밖으로 꺼내놓고 나면, 다시 방향을 잡기가 한결 수월해지더라고요.

Q.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포커페이스처럼 느껴집니다.

그런가요?(웃음) 경기 중에는 대부분 차분함을 유지하는 편이에요. 실제로 흔들리지 않을 때도 분명 있고요. 하지만 그게 잘 안 될 때가 더 많아요. 그럴수록 지난 경험들을 떠올려요. 비슷한 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를 기억하면서, 차분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죠. 평정심은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때마다 다시 붙잡는 거라고 생각해요.

Q. 경기 직전, 집중이 극대화되는 순간에는 무엇이 또렷해지고 무엇이 지워지나요? 이번 아시안게임처럼 큰 무대가 있을 때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도 궁금합니다.

경기 전에는 승패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해요. 승패에 집착하다 보면 긴장하게 되고, 퍼포먼스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심리 상태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동안 연습해 온 것을 바탕으로 그냥 경기하고 온다’는 생각만 남겨둬요. 이기고 지는 건 지우고, 준비해 온 것만 또렷하게 남기는 거죠. 경기 전에는 명상도 해요. 마음을 최대한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나면 온전히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Q. 끊임없는 훈련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환기하거나 새로움을 찾는 방법이 있나요?

저희는 루틴이 촘촘하고 연습 시간도 굉장히 길어요. 그래도 쉬는 시간을 틈틈이 잘 활용하려고 해요.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거죠. 원래도 종종 읽긴 했지만 요즘은 책 읽는 게 정말 좋고, 체스 같은 보드게임도 하고 있어요. 정해진 하루 안에서도 그런 작은 틈을 온전히 제 것으로 쓰는 게 저에게는 새로움이 되는 것 같아요.

게임을 하는 이유와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같아야 한다고 봐요.

이기는 선수에서 남기는 선수로

Q. 13년 동안 한 팀에 머문 만큼 ‘팀’에 대한 생각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페이커 님이 생각하는 리더십은 어떤 모습인가요?

처음 프로가 됐을 때는 팀을 그렇게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기기 위해 모인 조직이라고만 여겼죠. 그런데 선수 생활을 오래 하고, 그것도 같은 팀원들과 오래 함께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지금은 팀에서 맏형 역할을 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팀원들이 더 잘할 수 있을지를 자주 고민해요. 팀은 이기기 위해 모인 집단이기도 하지만, 함께 생활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주는 공동체이기도 해요. 굉장히 좋은 커뮤니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승리만큼이나, 거기까지 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다 같이 나누는 게 의미 있다고 느낍니다.

Q. 페이커 이후의 후배 선수들이 ‘이것만은 반드시’ 이어받았으면 하는 게 있다면요?

후배들이 경기를 통해 그저 상대를 이기는 데서 멈추지 않았으면 해요. 경기하는 과정 속에서 팬분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수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Q. ‘페이커’와 ‘이상혁’을 서로 다른 사람처럼 느낄 때도 있나요?

저는 자아를 둘로 나누기보다 하나로 통일하려고 해요. 게임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의 제가 다르다면, 제 가치관이 어딘가 어수선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게임을 하는 이유와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같아야 한다고 봐요.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제가 하는 일과 잘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모순 없는 삶을 산다고 느끼니까요. 그래서 게임을 하는 제가 평소의 저와 다른 자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팬분들께 즐거움을 드리는 게 좋아서 게임을 해요. 그리고 일상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Q. e스포츠의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 존속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2연패를 이뤘습니다. 2029년까지 T1과의 동행도 약속했는데요. 이미 정상에 선 지금, 페이커가 그리는 다음 스텝은 무엇인가요?

저는 게임이 좋아서 이 판에 뛰어들었어요. 게임이 좋았던 이유는 단순해요. 제가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앞으로 e스포츠가 더 길게 이어지고 저도 그 안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면, 게임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일도 물론 계속하겠지만, 결국 제가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싶어요. 성적이나 정상이라는 자리보다,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계속하는 것. 앞으로도 늘 그런 방식으로 제 삶을 꾸려나갈 것 같습니다.

Q. 마지막으로, 인간 이상혁으로서 페이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건강 잘 챙기고, 잠도 좀 잘 자라고요. 이것저것 하다 보면 사실 못 잘 때가 많거든요. 스스로 건강을 잘 돌보고, 항상 목표를 잃지 말고,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웃음)


  • 글. 한미림
  • 사진. 민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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