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사이의 시간, 서도호
오래전 스케치북에 남겨둔 생각은 수십 년 뒤 다른 모습의 작품으로 되돌아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서도호〉(2026. 8. 27~2027. 2. 9) 전시에선 그의 지난 40여 년을 따라 오래된 질문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삶을 통과하며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얻어왔는지 보여준다.
오래된 질문이 돌아오는 방식
서울에서 시작해 뉴욕과 런던 등 여러 도시를 거쳐온 서도호의 40여 년 작업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모였다. 유년기의 드로잉과 초기 작업부터 천으로 옮긴 건축적 공간, 탁본 작업과 영상, 최근 신작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태어난 작품들이 한자리에 펼쳐졌다.
전시가 시작되는 공간인 ‘시드 뱅크’에는 훗날 그의 작업으로 이어질 생각과 형식의 단서들이 모여 있다. 오래전 스케치북에 남겨둔 생각이 수년 뒤 작품으로 나타나고, 한때 지나쳤던 질문은 새로운 삶의 경험을 통과해 다른 형태로 되돌아온다. 40여 년을 돌아보는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지속과 변화가 한자리에서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서도호가 이번 전시를 ‘회고(回顧)’가 아닌 ‘회향(回向)’이라 부르는 것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한 시기를 끝내고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기보다, 여러 장소를 거치며 이어온 작업을 서울에서 관객과 나누는 자리라는 의미에 가깝다.
서도호의 이름에는 오랫동안 ‘집’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녔다. 자신이 살았던 집과 방, 복도와 계단을 반투명한 천으로 옮기고, 건축의 표면을 문질러 흔적을 기록하며, 서로 다른 도시의 공간을 하나의 구조 안에 연결해 왔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서 집은 목적지라기보다 질문이 시작되는 장소에 가깝다. 나의 공간은 어디까지인가? 그것은 타인의 공간과 어떻게 만나는가? 장소를 떠난 뒤에도 우리는 그곳과 관계를 맺는가? 개인과 타인의 경계에서 시작된 질문은 집과 이동을 거쳐 가족과 기억으로 이어져왔다.
사람은 머물고 움직이는 공간을 통해 장소를 경험하며, 그 경험은 몸의 감각과 기억으로 남는다. 손으로 표면을 문지르고, 몸에 옷을 걸치고, 문과 복도를 지나가는 과정에서 공간은 움직임과 감각, 기억과 에너지가 오가는 장소가 된다. 떠남은 익숙했던 장소를 기억의 공간으로 바꾸고, 새로운 관계와 삶이 빚어낸 사건들은 같은 장소를 이전과 다르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가 지나온 공간은 한 사람의 사유를 이루고, 그 사유는 다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된다. 사람은 한곳에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어쩌면 그곳은 더 이상 같은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16년 전, 서도호와 ‘너와 나 사이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우리가 이야기한 공간 역시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점유하는 영역이자, 타인과 경계를 만들고 개인과 공동체가 관계를 맺는 보이지 않는 구조에 가까웠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그의 작업 앞에 서자, 이번에는 그 공간 안을 지나온 ‘시간’이 보였다. 그사이 그는 여러 도시를 옮겨 살았고, 가족을 이루고 아버지가 됐다. 한때 멀리 있는 벽과 문손잡이에 맞춰져 있던 시선의 초점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로 이동했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부모 세대까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삶의 조건이 달라졌다고 해서 오래된 질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질문은 새로운 경험과 관계를 통과하며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나의 공간에서 타인의 공간으로, 나의 집에서 우리의 집으로. 이번 전시에서 만난 서도호의 40여 년은 그렇게 질문이 시간을 통과하며 변화해 온 궤적에 가깝다.
인터뷰
시간은 나선형으로 움직인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에선 40년 전의 작업과 최근작이 한 공간에 놓였습니다.
작년에 테이트모던에서 서베이 전시가 있었어요. 그때와 어떻게 다른 전시를 만들 것인가 고민했고, 그래서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복도에 ‘시드 뱅크’ 공간을 만들어 보여주게 됐어요. 제가 미국에 가기 전과 유학 초기에 했던 작업 및 생각들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옛날 스케치북을 들춰보면 저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요. 훗날 작업으로 발전한 아이디어가 이미 그 안에 있거든요. 당시에는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스케치북에 끄적거리고 그냥 넘어갔어요. 그런데 몇 년 뒤 다시 펼쳐보면 ‘이걸 내가 그때 이미 생각했었나?’ 싶을 정도로 이후 작업의 단서들이 보여요. 그래서 옛날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생각은 그때 바로 작업이 되지 않더라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나타나요.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의미가 나중에야 보이기도 하고요.
초기에는 개인을 둘러싼 공간과 그 안에서의 경험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삶의 변화와 함께 작업에서 바라보는 대상이나 관심의 초점도 조금씩 달라진 것 같습니다. 작가님에게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나요?
아버지가 된 게 제 인생에서 굉장히 큰 전환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카메라 렌즈로 비유하면 예전에는 저 멀리 있는 벽이나 문손잡이에 맞춰져 있던 초점이 아이들이 나타나면서 옮겨간 거죠.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제 삶을 돌아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앞뒤의 세대까지 함께 보게 됐죠. 그러면서 시간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일직선상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꼭 그렇게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결국 저는 시간이 나선형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나선형이라고 생각하면 시간과 공간은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집은 경험과 기억이다
작가님의 작업에서 ‘집’은 오랫동안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최근 작업에서는 물리적인 공간뿐 아니라 그곳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이 함께 보입니다. 특히 〈러빙/러빙: 서울 집〉(2013~2022)에서는 성북동 집의 표면을 한지로 덮고 직접 문질러 공간의 흔적을 떠냈는데요, 작가님에게 공간을 직접 ‘문지르고 흔적을 남기는 행위’는 기억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천 작업과 러빙 작업은 같은 공간, 같은 집을 대상으로 하지만 사실 굉장히 다른 작품이에요. 천은 언어로 따지면 기표예요. 의미를 전달하면 그 기능이 끝나는 거죠.
그런데 〈러빙/러빙〉 전시는 달라요. 러빙(rubbing)은 에너지를 그 집 전체에 쏟아붓는 일이에요. 직접 문지르다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아주 작은 나사 구멍 같은 흔적까지 나타나요. ‘이게 뭐였지?’ 하고 들여다보다 보면 그 물건을 사러 갔던 일이나 걸어갔던 길, 그날의 날씨와 햇살, 온도와 냄새 같은 것들이 하나씩 떠올라요. 손으로 직접 만지지 않았다면 계속 잊고 있었을 기억들이죠.
저는 〈러빙/러빙〉이 거의 글쓰기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작은 흔적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그 공간에서 나눴던 대화나 잊고 있던 순간까지 다시 떠오르거든요. 우리가 어떤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기억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머릿속 어딘가에는 남아 있지만 끄집어내지 못하는 거죠. 〈러빙/러빙〉은 그렇게 뒤로 밀려나 있던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었어요.
뉴욕에서 오래 살았던 집의 주인은 제 아버지와 나이가 같았어요. 저를 굉장히 아껴주셨던 분인데, 심리상담사였던 그분이 치매를 겪으며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어요.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저는 때로 알아보기도 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제 부모님도 함께 나이 들어가고 계셨고요. 그런 시간을 겪으면서 그 집을 떠날 때 무언가를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뉴욕 집을 러빙하게 된 것도 그런 경험과 연결돼 있어요.
서울 집은 제 아버지와 연결돼요. 아버지는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 이전 세대는 나라를 잃는 경험을 했어요. 주변의 많은 것이 사라질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살아오신 거죠. 제가 어릴 때도 부모님은 오래된 건축이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다른 곳에라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그런 생각으로 한옥을 지으셨죠. 저는 다른 이유로 한국을 떠났지만, 결국 집을 떠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상실이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러빙’은 사라지는 것에 대응하는 하나의 제스처였던 것 같아요.
기억은 몸을 따라 이동한다
마지막 전시 홀에 있는 〈사랑의 기억(레코드 협업)〉(2026)에서는 그 기억이 확장된 것처럼 보입니다. 예전에는 옷이 몸을 둘러싼 가장 작은 공간이었다면, 이제 그 안에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 들어왔어요.
초기부터 옷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공간으로 해석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옷은 한 사람을 보호하고 그 사람의 몸에 꼭 맞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니까요. 그런데 계속 들여다보니까 옷 안에도 또 공간이 있는 거예요. 주머니죠. 그러니까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제일 최소한의 공간은 주머니예요. 주머니에 내 물건을 넣어서 갖고 다니잖아요. 거기에 많은 에너지가 모일 것이고, 주머니 속 물건들과 함께 에너지와 기억도 우리와 같이 이동해 가죠.
옷에 대한 생각은 그런 식으로 한 단계 더 깊어졌어요. 〈사랑의 기억(레코드 협업)〉도 그런 생각과 연결돼 있고요. 가족들이 입었던 옷의 주머니를 가져오고, 실제 옷을 이어 안감을 만들게 됐어요. 완성된 코트를 처음 입었을 때는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했어요.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일지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는데, 팔을 소매에 넣는 순간 소매가 터널처럼 느껴졌어요. 천이 아닌 엄청난 에너지 같았어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그 메커니즘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해요.
‘나의 집’에서 ‘우리의 집’으로
여러 도시를 오가며 살아가는 지금, 한국이라는 장소와 ‘집’을 바라보는 의미도 예전과 달라졌나요?
많이 달라졌어요. 작업을 하다 보니 한국이라는 곳이 단순히 고향으로만 생각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감을 느끼면서 해온 작업들이 계속 있었어요. 이제 와 보면 우연은 아닌 것 같고, 어쩌면 저에게 주어진 미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 지금 제가 마시는 물 한 병을 생각하면, 그것을 여기까지 가져다준 사람이 있고, 물과 병을 만든 사람이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물의 근원이 된 자연이 있다는 데 이르러요. 그렇게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관계가 끝없이 이어지게 돼요.
제가 자란 한옥도 마찬가지예요. 그 집에는 그것을 지은 사람들의 엄청난 지식과 경험이 축적돼 있어요. 특히 한옥은 한국의 풍토와 문화, 정서를 반영한 건축 공간이고, 문과 창을 통해 열리는 구조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집은 단순히 저만의 집이 아닌 거예요. 여러 사람과 여러 세대의 경험이 그 안에 들어 있죠. 그냥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인 거예요.
이번 전시를 ‘회고’가 아니라 ‘회향’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지금까지 받아온 것을 다시 돌려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작가 입장에서 작품을 만드는 것 자체가 회향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작업을 통해 경험하고 생각해 온 것을 작품으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 특히 이번에는 제가 해온 작업을 한국의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드리는 것 자체가 회향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이미지가 과소비되는 시대입니다. 사진으로 수많은 작품을 접하지만, 저도 다른 작가의 작품을 사진으로 볼 때와 실제로 마주할 때가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아요. 사진으로 보고 그 작품을 안다고 생각해도 실제로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동안 한국에서 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모든 사람이 런던의 테이트모던까지 가서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번에 그동안 여러 곳에서 해온 작업들을 한국의 관객들에게 직접 잘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도호를 만날 수 있는 곳
LACMA 데이비드 게펀 갤러리
진행 중
고대부터 현대까지 폭넓은 시대와 지역의 미술을 아우르는 LACMA는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다. 2026년에는 건축가 페터 춤토어가 설계한 전시 공간인 데이비드 게펀 갤러리를 개관하며 새로운 장을 열었다. 새 갤러리에선 서도호의 대형 설치작품 〈Jagyeong Hall, Gyeongbok Palace〉(2025)를 만날 수 있다. 경복궁 자경전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집과 건축, 기억에 대한 작가의 오랜 탐구를 보여준다.
- lacma.org
- 대한항공은 인천 — 로스앤젤레스(LA) 직항 편을 주 14회 운항한다.
스미스소니언 국립 아시아 미술관
2024.4.27 – 2029.4.29
1923년 프리어 갤러리 오브 아트로 문을 연 미국 최초의 국립 아시아 미술관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아시아 미술을 연구하고 소개하는 주요 기관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미술관 앞 프리어 플라자에서는 개관 100주년을 기념해 설치한 서도호의 〈Public Figures〉(1998~2023)를 만날 수 있다. 거대한 좌대를 수많은 작은 인물이 떠받치는 작품으로 개인과 집단, 기념비와 공동체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 asia.si.edu
- 대한항공은 인천 — 워싱턴 D.C. 직항 편을 주 7회 운항한다.
도와다 미술관
영구 소장품
도시 곳곳을 하나의 예술 공간으로 연결하는 도와다 미술관은 각 전시실을 독립된 ‘예술을 위한 집’처럼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쿠사마 야요이, 론 뮤익 등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서도호의 〈Cause and Effect〉(2008)도 상설 컬렉션으로 선보인다. 수많은 작은 인물이 서로를 떠받치며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루는 작품으로 개인과 타인이 맺는 관계를 시각화했다. SANAA의 공동 설립자인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가 설계했다.
- towadaartcenter.com
- 대한항공은 인천 — 아오모리 직항 편을 주 5회 운항한다.
시애틀 아시아 미술관
진행 중
볼런티어 파크 안에 있으며 아시아 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연결하는 미술관이다. 1933년 문을 연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을 리노베이션하고 2020년 재개관했으며, 시애틀 미술관의 아시아 미술 컬렉션을 바탕으로 지역과 시대를 넘나드는 전시를 선보인다. 서도호의 초기 대표작 〈Some/One〉(2001)을 만날 수 있다. 수천 개의 군번표를 이어 거대한 갑옷의 형태로 만든 작품으로 하나와 다수, 개인과 집단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질문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 seattleartmuseum.org
- 대한항공은 인천 — 시애틀 직항 편을 주 12회 운항한다.
- 글. 최진이
- 사진. 임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