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문 미술관, 데이비드 게펀 갤러리
스위스 건축 거장 페터 춤토어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의 새로운 갤러리는 오늘날 미술관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선사시대 풍경 위에 세워진 미술관
로스앤젤레스는 대로와 고속도로를 따라 수평적으로 확장돼 온 도시라고 알려져 있다. LACMA의 새 미술관인 데이비드 게펀 갤러리는 이러한 도시의 수평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전체 건물은 하나의 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약 280m 길이의 거대한 콘크리트슬래브가 부지 전체를 가로지른다. 건물이 지면에서 약 9m 높이로 들어 올려진 채 윌셔 대로 위를 가로지르는 구조로, 방문객들이 공원을 거닐듯 예술과 아이디어 사이를 유영하길 바란다는 LACMA 관장 마이클 고반의 비전을 따랐다.
이 건물은 프리츠커건축상 수상자이자 동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어가 설계했다. 20여 년 전 처음 만난 춤토어와 고반은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긴 시간 함께 작업해 왔다.
박물관 특화 지구인 미라클 마일의 LACMA 캠퍼스 안에 자리한 미술관은 화석과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지형으로 유명한 선사시대 풍경, 라 브레아 타르 피츠 & 뮤지엄 옆에 서 있다. 춤토어는 이 장소를 본 순간 그 풍경에 매료됐는데, 검은 콘크리트가 땅 위를 천천히 퍼져나가 타르 구덩이 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떠올리며, 마치 기름 막 같은 형태의 건물을 구상했다.
각각의 작품을 위한 집 만들기
흐르는 듯한 건물 형태는 갤러리 내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공간 전체는 ‘가장 고귀한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통유리로 감싸였지만, 강렬한 캘리포니아의 햇빛은 일본 섬유 디자이너 스도 레이코가 제작한 커튼을 통과하며 한층 부드럽게 걸러진다. 얇고 섬세한 직물은 빛을 은은한 광채로 확산시키고, 바깥 풍경은 마치 꿈속 장면처럼 흐릿하게 번져 보인다. 작은 조개 조각이 섞인 짙은 회색 콘크리트 바닥은 그 빛과 색을 은은하게 반사하며 공간에 깊이를 더한다.
전시 방식 역시 기존 미술관 문법과는 다르다. 전통적인 분류 대신,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컬렉션을 재구성했다. 전시는 태평양, 인도양, 지중해, 대서양이라는 네 개의 바다를 축으로 펼쳐지는데, 이는 비행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무역과 이주를 통해 세계를 연결해 온 경로이기도 하다.
춤토어는 이를 두고 “각각의 작품을 위한 집”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거대한 동선 안에는 빛에 민감한 작품들을 위한 독립된 갤러리 공간들이 배치돼 있으며, 보다 어둡고 정제된 환경 속에서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천장과 대부분의 벽은 거푸집 자국이 남은 콘크리트 그대로를 유지했고, 일부 벽면에는 깊은 테라코타와 인디고, 짙은 회색을 더해 공간의 밀도를 높였다. 그 안에서는 이집트 · 그리스 · 로마 유물과 불교미술, 1960년대 자동차와 현대 가구 그리고 가쓰시카 호쿠사이, 앙리 마티스, 프랜시스 베이컨,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작품들이 공존한다. 관람객들은 로스앤젤레스의 다문화적 거리 풍경 속을 거니는 것처럼 작품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서로 다른 장면과 시선, 문화의 층위를 경험하게 된다.
할리우드의 문화적 직물
지상부에는 레스토랑과 상점, 교육 공간, 극장 등이 일곱 개의 파빌리온 형태로 배치돼 있다.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슬래브 아래로는 약 1만 4164㎡ 규모의 그늘진 공공 광장이 펼쳐지는데, 시민들이 자유롭게 머물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활용된다.
공원처럼 펼쳐진 캠퍼스를 따라 걷다 보면 LACMA의 또 다른 건축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미국 건축가 브루스 고프가 설계한 일본 미술 전시관 그리고 프리츠커건축상을 수상한 렌조 피아노의 브로드 현대미술관과 린다 & 스튜어트 레스닉 전시관이다. 렌조 피아노는 인근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도 설계했는데, 이는 이 일대가 영화와 예술, 건축이 어우러진 할리우드 문화 지형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총 7억 2400만 달러 규모의 신관은 건축비의 약 80%를 민간 기부로 마련했으며, 최대 후원자인 데이비드 게펀의 이름을 건물명에 담았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로 이뤄진 이 건물은 환경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수 세기 동안 남을 수 있을 만큼의 강한 물성을 지닌 건축으로 받아들여진다.
약 5만 년 전부터 1만 1000년 전 사이의 매머드 화석이 발굴된 라 브레아 타르 피츠의 끓어오르는 풍경 앞에 서 있으면, 지구의 긴 시간 속에서 인간의 시대가 얼마나 짧고 덧없는 순간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데이비드 게펀 갤러리는 바로 그런 시간 위에 세워진, 21세기 로스앤젤레스의 창의성과 야망 그리고 당대의 논쟁까지 함께 담아낸 문화적 기념비다.
Places to Explore Around LACMA
라 브레아 타르 피츠
라 브레아 타르 피츠는 끓어오르는 천연 아스팔트와 선사시대 화석이 공존하는 독특한 고생물학 유적지다. 이곳의 역사와 발굴된 화석들을 소개하는 박물관은 현재 리노베이션 공사에 들어가 2028년까지 문을 닫을 예정이지만, 방문객들은 지정된 관람 구역에서 여전히 타르 웅덩이와 현재 진행 중인 발굴 현장을 볼 수 있다.
- tarpits.org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영화 제작의 예술과 과학 그리고 영화인을 조명하는 미국 최대 규모의 영화 전문 박물관이다. 복원된 역사적 건물인 사반 빌딩과 유리·콘크리트로 이뤄진 둥근 형태의 신관으로 구성돼 있으며, 두 건물 모두 렌조 피아노가 설계를 맡았다. 내부에는 영화사 관련 전시와 실제 소품, 의상, 영상 아카이브, 상영관 등이 마련돼 있다.
- academymuseum.org
피터슨 자동차 박물관
자동차의 역사, 디자인, 문화를 다루는 세계적인 자동차 박물관. 붉은 강철 리본이 감싸는 독특한 외관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내부에 전시된 300대 이상의 클래식 카와 콘셉트 카, 희귀 차량들은 자동차가 기술과 도시 문화, 대중적 상상력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 petersen.org
크래프트 컨템퍼러리
윌셔 대로에 위치한 작은 미술관으로, 재료성과 제작 과정을 기반으로 한 동시대 예술을 소개한다. 1930년에 디자인된 건물에 자리한 이곳에서는 도자와 섬유, 금속 공예 등을 중심으로 한 전시와 워크숍 프로그램을 운영해,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 craftcontemporary.org
디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
1934년부터 운영해 온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인 야외 시장이다. 식료품점, 베이커리, 음식점 등 100개 이상의 상점이 모여 있으며, 유명한 시계탑도 있어 현지인과 여행객이 일상적으로 즐겨 찾는 곳이다. 더 그로브 쇼핑몰과 바로 연결돼 함께 둘러보기 좋다.
- farmersmarketla.com
- 야마시타 메구미는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디자인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리서처, 큐레이터다.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월페이퍼〉, 〈카사 브루투스〉 등에 기고하며, 국제 프로젝트의 리서치·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 글. 야마시타 메구미
- 사진. 이완 반
- 대한항공은 인천 — 로스앤젤레스(LA) 직항 편을 주 14회 운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