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시간을 잇다, 더 루프
‘더 루프’는 상하이 신톈디의 역사적 맥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곳이다. 전통의 리롱 골목이 지닌 공간성과 붉은 화분이 상징하는 기억을 담아, 도시와 자연,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새로운 건축 언어로 재탄생했다.
© Lee Jeonghoon
아이콘이 아닌, 맥락을 짓다
장 누벨은 맥락과 스타일을 모두 중시하는 건축가다. 그의 건축은 단순한 해석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대화하도록 만든다. 그는 건축을 도시의 아이콘으로 만들지만 그 속에는 항상 역사적 맥락과 시적·철학적 은유로 가득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역사적 맥락에 기반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최첨단 기술과 미래적 도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건축은 공학의 정점에 서서 시적 감성에 맞닿아 있다.
상하이의 ‘더 루프’ 또한 장 누벨의 건축 철학을 잇는 작품이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하이의 독특한 조계지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조계지(租界地)는 글자 그대로 ‘빌려서 통치하는 땅’을 의미하며, 서구 열강이 특정 도시 내에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자치적으로 통치했던 구역이다.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나고 1845년에 오늘날 와이탄과 난징루 일대에 영국 조계지가, 화이하이중루와 신톈디를 중심으로는 프랑스 조계지가 형성됐다. 그리고 각각 다른 도시 문화가 이식됐다. 영국 조계지가 금융, 경제, 관공서 위주의 건축으로 이루어졌다면, 프랑스 조계지는 저층 단독주택과 프랑스식 주거 블록, 카페, 레스토랑, 상점 중심의 거리로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
전통 골목길이 현대건축을 만날 때
더 루프는 프랑스 조계지였던 신톈디에 위치해 있다. 푸싱루와 신톈디 일대는 프랑스식 벽돌로 지어진 낮은 정원형 건축이 주를 이룬다. 특히 건물과 보도 사이에 정원을 두어 사적 영역과 공적 공간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조계지에는 외국인만 거주할 수 있었지만 점차 중국인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수용할 중간 형태의 주거 유형이 필요하게 됐다. 이렇게 조계지 확장과 함께 중국 전통 건축 양식인 사합원(四合院), 즉 중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면에 건물이 배치된 형태가 기본이 되는 새로운 주거 유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식으로 설명하면 조그마한 정원을 지닌 단독주택들이 합벽으로 붙어 있는 연립주택과 같은 형태로 이를 스쿠먼 양식이라 한다. 상하이를 찾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봤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도 스쿠먼 양식의 전형에 속한다.
신톈디는 스쿠먼 양식 건물이 밀집했던 리롱 골목 구역(전통 골목 주거지)을 재개발한 현대적 도시 문화공간이다. 장 누벨은 리롱 골목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받아 이곳이 지녔던 중성적 경계면과 예측 불가능한 동선을 현대건축 언어로 번역했다. 즉 전통의 리롱 골목길이 서로 교차하고 이어지는 풍경을 현대 건축적 스케일로 옮겼는데 이 골목의 복잡하고 정돈되지 않은, 그러면서도 감각적인 요소를 살려 도시적 볼륨을 통한 시적 상상력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붉은 기억을 품은 살아 있는 건축
네 개 동으로 이루어진 더 루프는 하나의 복합체처럼 연결되며 저층부는 쇼핑, 카페 등 공공·상업 공간이 들어서 있고, 상층부는 사무실 및 업무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을 가로지르며 내부 공간들을 연결하는 골목길은 다시 지하 공간과 이어지고, 내부 광장에서는 다양한 소규모 행사가 치러진다. 도시적 경계면을 모호하게 결합해낸 새로운 유형의 골목길은 세련된 상업 프로그램과 만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머무르며 공간을 경험하게 한다.
또한 장 누벨은 건물을 좀 더 역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2500여 개의 화분으로 건물을 구성했다. 외벽과 아케이드 공간 곳곳에 식재용 화분을 설치했는데, 이는 건축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일체화된 자연 그 자체를 제안한 것이다.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 식재는 도시 속 건축을 보다 생동감 있고 역동적으로 변모시킨다. 사실 이 식재 시스템은 미적 측면을 넘어 미세먼지 저감, 열섬현상 완화, 기후조절 등 도시의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기능하게 한다. 외부에 쓰인 붉은 화분은 중국 전통 건축에서 길상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색이자 리롱의 전통 붉은벽돌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상하이의 역사와 집단적 과거의 기억을 붉은색을 통해 환기시키고자 함이다. 건축이자 조경 그 자체인 이 새로운 도심 블록은 상하이의 현재와 미래를 상징한다.
Places to Explore Around The Roof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상하이에 자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거점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장소다. 당시 집무실과 회의실, 생활공간이 보존돼,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체감할 수 있다.
- No. 4, Lane 306, Madang Road, Huangpu District, Shanghai
신톈디 북리 + 남리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바로 옆에 자리한 신톈디는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표 문화지구다. 북리는 석고문 건축을 보존해 전통적인 정취를 살린 공간으로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가 어우러져 있고, 남리는 현대적 건축과 글로벌 브랜드, 미식 공간이 모여 있다.
상하이 박물관
1952년에 설립된 세계적인 중국 고대미술 전문 박물관으로 청동기, 도자기, 서예, 회화, 옥기 등 방대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인민 광장에 자리한 본관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해외 주요 박물관과 협업해 다양한 문화의 특별전을 선보인다. 푸둥에 동관이 있다.
- shanghaimuseum.net
화이하이중루
상하이 대표 쇼핑 거리이자 옛 프랑스 조계지의 분위기를 간직한 곳. 명품 부티크와 글로벌 브랜드 매장, 세련된 레스토랑과 바가 즐비해 저녁이 되면 아름다운 도시의 밤 풍경으로 더욱 활기를 띤다. 낭만적인 저녁 식사와 산책을 즐기기 좋다.
위위안 정원
명나라 시대에 조성된 상하이 대표 전통 정원 위위안에서는 연못과 누각, 인공 산수와 정자가 어우러진 중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인근의 청황먀오 시장은 기념품 쇼핑과 상하이 로컬 간식을 함께 즐길 수 있어, 위위안 정원과 한 코스로 묶어 둘러보기 좋다.
- 218 Anren Street, Huangpu District, Shanghai
- 이정훈은 조호 건축사사무소(JOHO Architecture) 대표다. 2013년에 세계적 건축 잡지 〈아키텍처럴 레코드〉가 선정한 ‘차세대 건축을 이끌 10인’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 글. 이정훈
- 사진. 10 Studio
- 대한항공은 인천—상하이 직항 편을 주 21회 운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