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한 잔의 풍류
전통주 한 잔에는 역사가 담긴다. 최근 전통주가 미식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과거의 기억이자 현재의 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 다시 르네상스를 맞이한 한국 전통주의 여정을 따라가며 술 한 잔에 깃든 시간과 문화를 되짚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는 한반도에서
한국에 술이 등장한 시기는 농경이 시작된 약 1만 5000~1만 7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충북 소로리에서 볍씨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의 흔적이다. 아마도 이때 벼농사를 통해 재배된 쌀이 발효를 거쳐 술이 됐을 것으로 가늠된다. 고구려 건국신화 속 해모수와 유화의 사랑 이야기에 술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유리왕 시절, 추석에 술과 음식을 준비해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이 지금의 이란 지역에 있던 호라즘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이슬람 연금술과 함께 증류 기술을 들여왔다.
알코올의 끓는점이 물보다 낮다는 원리를 이용해 술을 증류했고, 이를 ‘불태울 소(燒)’, ‘술 주(酒)’라 하여 소주라 불렀다. 영어의 브랜디(brandy)도 ‘불에 탄 와인 (burnt wine)’이라는 뜻이다.
십자군전쟁을 통해 전해진 증류 기술은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코틀랜드로 가서 스카치위스키가 됐고, 프랑스로 이어져 코냑으로, 동유럽으로 건너가 보드카로 발전했다. 이렇게 보면 소주와 스카치위스키, 코냑, 보드카는 한 뿌리에서 나온 ‘친척’이다. 한국에서는 안동소주, 제주 고소리술, 개경의 감흥로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의 금주령과 주막 문화
옛 방식으로 만든 소주는 매우 귀했다. 쌀 1kg으로 40도 소주를 빚어도 불과 400ml 남짓밖에 나오지 않았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치였다. 조선왕조는 지속적으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이를 완화함으로써 상업의 발전을 도모했다. 이때 발달한 것이 주막이다. 주막에도 여러 등급이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5성급 주막에 해당하는 ‘역(驛)’은 국경 근처에 있었고, 주모와 다모가 각각 100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시설을 갖췄다. 마굿간, 환전, 택배 등의 역할도 했다. 4성급 주막에 해당하는 ‘원(院)’은 관과 민이 함께 운영했는데, 조치원, 사리원, 인덕원, 홍제원, 이태원 등 오늘날 지명에 ‘원’이 남아 있는 곳들이 당시 고급 주막의 자리였다. 또한 24시간 영업하는 날밤집, 술청 앞에 선 채로 간단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선술집, 대포(큰 술잔으로 마시는 술)를 파는 대폿집 등이 등장하며 술문화가 다양해졌다.
전통주의 주인공, 여성들
외국에서는 양조장과 증류소가 술 산업을 이끌었지만, 한국에서는 어머니들이 술을 빚었다. 17세기 기록인 〈주방문〉과 안동 장씨가 기록한 〈음식디미방〉은 시집간 여성들이 집안의 전통주를 빚은 기록을 담고 있다. 한국 전통주는 쌀, 물, 누룩 세 가지 요소에서 출발한다. 이 세 가지 기본 재료만으로 매우 다채로운 스타일과 맛을 구현할 수 있는데, 그들은 물을 타지 않고 떠먹는 막걸리인 이화주, 붉은 누룩을 넣은 홍탁주, 쌀과 포도를 함께 넣은 포도주 등 창의적인 술을 빚었다. 봄에는 진달래꽃, 여름에는 연꽃, 가을에는 국화 등 계절마다 재료를 달리해 술에 계절을 담았다.
술맛이 좋으면 그 집안이 평안하다고 여겼는데, 발효주 특성상 관리가 잘돼야 맛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술맛이 나쁘면 집안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그러나 이런 문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다. 1909년 일제가 가정에서 빚은 술에 세금을 부과하는 주세법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1963년 대흉년 이후에는 정부가 나서 쌀을 사용한 술 빚기를 금지했다. 그 결과 전통주 대신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섞은 희석식 소주와 밀가루 막걸리가 판을 치게 됐다. 술의 맛과 향을 즐기던 전통문화가 급격히 사라진 시기였다.
전통주의 르네상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술 관련 무형유산(옛 무형문화재) 지정이 이뤄지고 전통주 복원도 시작됐다. 2010년대에는 정부가 전통주를 지정하고 한정된 경로로 온라인 판매를 허용하며 저변확대를 도왔다. 이 과정에서 고급 막걸리와 프리미엄 전통주가 등장했고, 강남과 홍대 등지의 유명 한식 주점에서 전통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술들은 지역 농산물로 만들며, 숙성 기간이 길고 인공감미료를 사용하지 않아 원재료의 맛이 살아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3년부터 전국에 문화와 체험이 있는 양조장을 알리기 위해 ‘찾아가는 양조장’ 제도를 운영했다. 당진의 신평양조장, 단양의 대강양조장, 해남의 해창주조장, 제주도의 제주샘주와 제주술익는집, 명인안동소주 등이 대표적이다. 관광과 문화 콘텐츠가 확산되면서 전통주는 그야말로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대통령이 외국 귀빈에게 만찬주로 전통주를 대접하고, 백화점에 전통주 전문 매대가 생겼으며, 홍대 주변에는 전통주 전문 소매점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문헌 속 레시피를 복원한 제품, 예술가와 협업한 전통주, AR을 접목한 전통주, 미니어처 전통주, 오크 통 숙성 소주, 쌀로 만든 ‘라이스 위스키’, 바질을 넣은 ‘바질 막걸리’, 지역의 특산품을 살린 ‘과일 막걸리’ 등 다양한 품목이 출시되며 소비자와의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
서울 미식 신에서 전통주는 새로운 주인공이다. 대표적 모던 코리안 파인 다이닝인 ‘에빗’과 ‘이타닉 가든’, ‘비움’에서는 전통 양조장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셰프의 철학이 담긴 술과 음식을 페어링해 입체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전통주를 단순한 곁들임이 아닌, 요리와 동행하는 하나의 스토리로 풀어낸다. 시간을 숙성시킨 술과 현대적인 미감이 어우러진 그 순간, 식사는 하나의 감각적인 서사로 완성된다.
‘2025 아시아 50 베스트 바’에서 6위에 랭크된 ‘바 참’은 전통주와 한국의 로컬 식재료를 활용한 칵테일로 MZ 세대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다.
이처럼 한국 전통주는 단순히 마시는 술이 아니라 원재료의 풍미와 지역의 가치,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경험을 담고 있다. 현재도 전국 수백 개 양조장에서 막걸리, 약주, 청주, 전통 소주, 과실주 등 다양한 술이 생산되고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여행과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강력한 문화 콘텐츠다.
명욱은 대한민국 대표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전문가다. 술이 로컬의 가치, 역사, 문화, 사회 탐구로 이어지는 모습을 국내외로 전달하고 있다.
- 글. 명욱
- 에디터. 양연주
- 사진. 박다빈(그리드스튜디오)
- 푸드 스타일링. 문인영(101레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