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방법
〈모닝캄〉은 일상의 풍경에 깊은 사유를 더한 ‘옴니버스 스토리’를 전한다. 다국적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시선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이, 비행 중 그리고 비행이 끝난 후에도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이번 호에서는 동시대 대표 작가이자 지식인인 알랭 드 보통과 그가 설립한 ‘인생학교’가 전하는 여행의 즐거움에 대한 일상의 철학을 나눈다.
- 알랭 드 보통은 스위스 출신의 작가이자 지식인이다. 사랑, 여행, 건축, 일과 같은 현대인의 일상 속 주제들을 철학적 시선으로 풀어내며,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로 삶을 새롭게 조명해 오고 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여행의 기술〉, 〈불안〉, 〈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등에서 감성과 사유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세계적인 공감을 얻었고, 2008년에는 철학을 대중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인생학교’를 설립해, 현대인의 삶을 위한 철학과 실용적 지혜를 전하고 있다. 2003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다.
내 마음의 경계를 넓혀주는 여행의 기술
친애하는 〈모닝캄〉 독자에게
나는 여행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한다고 늘 믿어왔다. 결국 우리의 여정은 서울과 카사블랑카, 베를린과 부산 사이의 수많은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지형을 가로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여행은 우리에게 부드럽지만 깊이 있는 치유의 시간을 선물해 준다.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기존과 전혀 다른 장소와 사람 그리고 문화를 마주하게 된다. 전라남도를 달리는 기차 창밖으로 스쳐가는 논밭의 질서 정연한 풍경에 감탄하거나, 낯선 나라에서 마주친 사람의 스카프를 묶는 방식이나 차를 따르는 손짓에 문득 눈길을 빼앗기기도 한다. 이런 작고 사소한 발견은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를 일깨워주며, 동시에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이처럼 외적인 모험과 더불어, 여행에는 또 다른 재미인 조용한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나는 경험’이다. 고도 1만 668m의 하늘 위, 비행기 창가에 기대어 구름이 산처럼 솟아 있는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집에서는 커다랗게만 느껴졌던 걱정과 긴장감이 그저 작고 흐릿한 점처럼 여겨지곤 한다. 지구의 곡선이 눈앞에 펼쳐질 때, 하늘은 마치 속삭이듯 말하는 것 같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조금 더 지혜롭고, 친절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여행에 대한 단상을 공유할 수 있도록 지면에 초대해 준 대한항공과 〈모닝캄〉에게 감사를 전한다. 나에게 한국은 언제나 여정을 이해하는 예술에 능한 나라다. 그것이 자연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일이든, 생각과 감정의 세계를 여행하는 일이든 말이다. 고요히 내리는 눈이 소나무 가지에 안착하는 순간을 담은 시, 정갈하게 차려낸 한 상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만족감 등, 한국에는 ‘주의 깊게 바라보고, 음미하며, 보다 부드러운 시선으로 세상과 자신을 다시 보는 법’을 아는 문화가 존재한다고 느껴진다.
먼 도시로 향하는 길 위에 있든, 혹은 집 안에서 조용한 오후를 보내며 한때 사랑했던 장소들을 마음속에 다시 떠올리는 순간이든, 〈모닝캄〉 독자 여러분의 여행에 작은 벗이 되기를 바라며 인생학교와 함께 집필해 발표했던 세 편의 에세이를 소개한다. 이 글들은 여행이 단지 공간을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경계를 넓혀주는 경험이 됨을 상기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곳이 구름 위든 혹은 편안한 거실 소파 위든 상관없이, 당신의 여정이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영감을 주며, ‘내가 되고 싶은 나’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따뜻한 마음과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알랭 드 보통
여행지를 고르는 일
현대사회는 우리가 여행할 만한 다양한 장소를 끊임없이 추천해 주지만,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이 사실 얼마나 깊고 복잡한 문제들을 내포하는지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이상적인 여행지를 고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수다.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행복이라는 단어에 담긴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여행지에는 저마다의 특징이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 본성의 특정한 부분을 건드려 반응을 촉진한다. 예를 들어, 남호주의 길고 텅 빈 해변은 우리에게 평온함을 준다. 암스테르담 근교의 시외는 중산층의 삶이 주는 즐거움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LA는 잠들어 있던 야망을 깨우고, 돈 얘기를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마이애미나 리우데자네이루 같은 곳들은 꽉 막힌 경계심을 풀도록 돕고, 조금 더 즐기면서 살아보자며 손을 잡아당긴다.
우리가 끌리는 여행지들은 알고 보면 현재의 삶에 없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고 느끼는 장소들이다. 우리는 단지 새로운 곳을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배움을 얻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른 여행지는 마음의 안정을 약속하는 곳이다. 자신의 부족함은 채워주고 넘치면 덜어주는 곳. 이상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방문하는 곳은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의 여행지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자극인 것이다. 그렇기에 여행할 장소에 대한 현명한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세상 밖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안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 삶에 비어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은 어디인지를 말이다. 이런 질문들을 통해 이 지구의 어느 곳에 나를 도와줄 힘을 지닌 장소가 있는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곳은 자연일 수도 혹은 도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열대지방이거나 빙하가 가득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육체적인 경험으로 시작할지 몰라도, 우리를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게 만드는 내면의 여행이 동반돼야만 비로소 여행이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파리에서 며칠이 주어진다면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도시 중 하나다. 그곳에서 며칠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과 동시에 여행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중요한 질문들에도 답해보려 한다. 많은 경우 파리를 여행한다는 것은 그들의 문화에 존경을 표하는 일이다. 시대를 아울렀던 인물들의 작품을 보고 그들이 살았던 장소를 방문해 본다. 그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인물들이 하지 않았을 한 가지를 꼽는다면 바로 미술관에 가는 일이다. 그들이 만든 것을 보거나 그들이 즐겨 찾던 장소에 가는 것 말고 그들이 진정 사랑했던 것들을 사랑해 본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18세기 화가인 샤르댕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루브르박물관에 가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샤르댕이 즐겨 한 행동이 아니다. 그는 전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좋아한 것은 가게에 들러 사과를 사고 그것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우리는 생제르맹 거리와 생브누아 길 사이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에 가서 장폴 사르트르가 수없이 철학에 관한 글을 썼던 자리에 앉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곳을 방문해 영감을 얻고 창작의 욕구가 솟아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나은 자신을 꿈꾸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방식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 사르트르가 그 카페에 간 이유는 그의 집에서 카페까지 걷는 산책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음식값도 싸고 방문하기도 편했던 것이 이유였다. 다른 작가들은 어디서 점심을 먹는지 찾다가 들른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정신적으로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우리도 그가 했던 대로 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숙소에서 가깝고 저렴한 카페를 찾아 영감을 얻어보는 것이다. 카르나발레박물관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침실을 재현해 놓은 전시를 흥미롭게 관람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명작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대부분을 쓴 것으로 알려진 코르크 벽 소재의 방을 꼭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프루스트는 이런 일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좋아한 것은 자신의 침실에 머무르며 지난 어린 시절을 빠짐없이 돌아보는 일이었다. 그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보라고 권할 것이다. 진짜 프루스트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머무는 숙소의 침대다.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치고 노트르담대성당에 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성당을 지은 사람들은 아마도 당연히 당신이 와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부벽을 이용한 선구적인 건축양식이나 지붕 꼭대기의 가고일이 물을 내뿜는 모습에 감탄하기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이곳에 와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죄를 반성하기를,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고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면의 고민과 성찰은 굳이 노트르담대성당이 아니어도 된다. 그것은 오히려 파시 공동묘지처럼 덜 유명한 곳을 방문했을 때 더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곳이야말로 인생의 덧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집착과 상처로 가득 찬 우리 인생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한다.
오르세박물관에서는 생라자르역의 그림이 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흔히들 클로드 모네가 1877년에 그린 작품으로 알고 있는 그 그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네는 이 작품을 오르세박물관에서 그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교통 밀집지를 찾아다니며 현대의 기술적 진보가 완성한 정교함을 관찰하고는 했다. 우리가 진정 모네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고 싶다면 다른 어디를 가는 것보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우리가 파리를 방문할 때 떠올리기 바쁜 위대한 인물 중 그 누구도 휴가를 즐기기 위해 파리에 가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어쩌다 살게 된 장소에서 글을 쓰고, 생각하고, 또 그렸을 뿐이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사물이었다. 일상의 물건이 지닌 아름다움, 인생의 의미 그리고 추억들. 모두 장소 그 자체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파리에서 이틀을 보내며 얻을 수 있는 이상적인 깨달음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굳이 파리를 여행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각일지도 모른다.
추억을 간직하는 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즐거운 경험을 쌓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 돈은 그보다 더 쓴다. 비행기표를 사고, 해변에 가고, 빙하를 경이에 차서 보고, 코끼리가 물 먹는 모습을 본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바로 경험 그 자체다. 비록 일정 시간이 지나면 끝나버리지만 말이다. 지나간 경험을 다시 되짚어 생각하는 것만으로 흥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되돌아보면 왠지 슬프기까지 하다. 우리는 지난 경험을 추억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경험한 것을 마음의 찬장 뒤편에 밀어 넣어버리곤 딱히 다시 사용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 경험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갑작스레 추억이 돌아올 때가 있다. 전철을 타고 가는 지루한 출근길, 갑자기 해변에서의 이른 아침이 되살아난다. 혹은 샤워를 하다가 10년 전 한 친구와 꽃으로 가득한 산을 올랐던 추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추억을 떠올리려고 일부러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때로는 그렇게 떠오른 추억을 몽상이나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서둘러 지워버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삶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 것인지, 그 순서를 조금만 바꾸고 정기적으로 과거를 추억해 보면 어떨까? 추억은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위로까지 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 때나 즐길 수 있는 가장 값싼 엔터테인먼트인 것은 덤이다. 그러니 틈틈이 우리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접 어느 섬을 방문했던 경험만큼, 집에 앉아 가만히 섬에서의 추억을 떠올려보는 것 또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추억을 푸대접하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버릇없는 어린아이와 같다.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을 일부만 짜내고 나머지는 집어던져 버린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얻은 추억들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에 탐닉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추억을 좀 더 잘 기억해 내기 위해서 어떤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당연하지만 카메라조차 없어도 된다. 우리 마음속에 이미 카메라가 있다. 언제나 켜져 있고 우리가 본 모든 것을 기록해 둔 카메라. 그 많은 기억이 여전히 우리의 머릿속에 선명히 자리하고 있다. 그들을 불러내는 데 필요한 것은 단초가 될 질문뿐이다. “착륙하고 나서 어디부터 갔더라?” “처음 먹은 아침 식사가 어땠더라?” 바로 거기가 이야기의 시작이다. 잠도 안 오고 와이파이도 터지지 않는 밤이면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우리 눈앞에 펼쳐지지 않는다고 그 추억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소환의 마법을 통해 우리는 그 경험이 주었던 즐거움을 여전히 기억해낼 수 있다.
가상현실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전자제품이 아니다. 가장 뛰어난 가상현실 기기는 이미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다. 눈만 감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 인생을 바꿔놓은 놀라운 경험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 가끔은 그곳에서 오래 머물러도 괜찮다.
- 본문은 〈나를 채우는 여행의 기술〉(RIDI, 2023)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 글.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 일러스트레이션.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