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으로 미래를 짓다, 경주
천년 왕도의 숨결 위에 세계가 모인다. 2025 APEC 정상회의 개최지 경주는 왕릉과 유적, 예술이 어우러진 무대에서 미래를 향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제33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21개 회원국의 각료와 초대 정상, 언론인을 포함한 6000여 명이 동행하는 국가적 행사인 AEPC의 개최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인 경주가 선정된 것은 지극히 적절한 일로 여겨진다. 신라는 일찍이 서역에도 알려진 국제적인 도시였기 때문이다.
천오백 년 전, 동아시아의 개방도시
아라비아 지리학자인 알마끄디시는 966년에 펴낸 〈창세와 역사서〉에 “신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의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여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했다. 〈삼국유사〉 원성왕(미상~798) 편에는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과거 중국 서북부 지역) 사람 둘을 데리고 와서 한 달간 머물렀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하서인을 실크로드의 중심 세력인 위구르인이나 소그드인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원성왕이 잠들어 있는 괘릉(원성왕릉)의 문무인 석상은 신라 왕릉에서 처음 등장한 이국적 석인상으로, 이란인과 위구르인으로 추정된다. 무인의 이마에 두른 띠는 고대 사산왕조 이란 귀족들의 징표였다.
천 년 역사(BC 57~AD 935)를 가진 신라의 수도 경주의 통치자는 4~6세기에 이미 동부 지중해산으로 알려진 로만글라스를 수입하고, 동유럽이 주산지인 석류석 가닛이 박힌 황금 보검을 부장품으로 사용했을 만큼 이국 정취에 개방적이었다. 마립간이라 불리는 이 시기 6대 김씨 왕들(356~514)의 거대 왕릉 적석목곽분(목곽과 목관 위에 돌을 쌓고 봉분을 만든 묘제)은 신라 왕궁과 가까웠던 도심의 대릉원에 밀집돼 있는데, 능이 발굴될 때마다 지진처럼 쏟아진 이국적인 금빛 유물은 국민에게 자부심과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
경주에 처음 발길을 딛는 여행자라면 도심에 산재한 수많은 왕릉부터 먼저 눈에 담게 되리라. 일제강점기 때 조사된 도심의 고분은 155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지만 실제로는 800여 기가 넘는다. 땅만 파면 고대 유물이 나온다는 경주는 한국판 룩소르라고 해도 될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수만 점의 부장품으로 정체성을 새긴 신라 DNA의 뿌리라 할 대릉원, 이어 노서동 고분공원에는 일제강점기에 가옥 증축으로 우연히 금 유물이 드러나 약식으로 첫 발굴 조사를 하게 된 금관총과 몇 기의 고분이 정비돼 있다.
금 장신구들 외에 무기류까지 모두 4만 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동양의 ‘투탕카멘의 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에서는 신라 고분의 중축 과정을 볼 수 있어 흥미로울 것이다. 1973년 한국 고고학자들이 첫 발굴해 신라의 희귀한 회화 자료인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국보 제207호)를 수확한 천마총의 복원 전시관은 이미 고고학적 명소가 됐다. 2014년부터 10여 년간 발굴한 쪽샘44호분의 어린 신라 공주 무덤 구조도 쪽샘유적발굴관에 재현돼 고고학의 성과를 나누고 있다.
경주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고도이다. APEC 정상회의를 기념해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에서 10월 12일까지 열리는 〈한국 근현대 미술 ‘4인의 거장들: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전시는 경주의 또 다른 예술적 역사를 조명한다. 4인의 전시 중 특히 평범한 삶을 질박하게 표현해 동양적 절제미를 보여주는 박수근의 그림은 거친 질감(마티에르)이 특징이다. 세 번에서 많게는 스물두 번까지 덧칠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생시에 경주를 자주 오갔던 박수근은 경주 불상의 거친 화강암 재질에 매료됐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소명을 태고의 침묵처럼 단단한 신라 불상의 화강암에서 찾아 구도자처럼 덧칠을 거듭해 왔다.
초석 위에 피어난 시간
‘한국 근대 지식인을 통해 본 경주’라는 부제가 붙은 책 〈경주에 가거든〉에는 당대를 풍미했던 문인과 예술가들이 일제강점기 때 경주를 찾아와 쏟아놓은 감동이 가득 담겨 있다. 시인 이육사의 동생으로 평론가였던 이원조는 “눈에 들어오는 어딘지 모를 산야의 웅혼 장대한 맛에 가히 사라진 왕가의 남은 자취를 엿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주춧돌만 남은 황룡사지 앞에 섰더라면 절창의 감회를 남겼을 것 같다. 신라 24대 진흥왕 553년 궁궐을 지으려던 월성 동쪽에 황룡이 나타났다 하여 절을 창간하고 황룡사라 하였다. 주위에 담장을 쌓고 17년 만에 공사를 마쳤으며 무게가 3만 5000여 근이 되는 거대한 금동불도 조성했다. 아홉 나라 적을 물리치고자 80여 m에 달하는 목탑을 27대 선덕여왕 때(645년) 세웠으니 4대 왕에 걸쳐 거의 100년의 대역사를 마무리한 신라 최고의 국가 사찰이었다.
이 경건한 황룡사는 고려 1238년 몽골 침략에 불타버렸다. 그 재가 수십일 동안 하늘을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었다는데, 시간이 할퀴고 적국의 말발굽이 짓밟았어도 뿌리내린 초석만은 어쩌지 못했다. 1980년대 학부생으로 방학 때마다 황룡사지 관련해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 유산연구원)를 오가며 유물 정리를 했던 한정호 교수 (동국대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는 여름에 유난히 잦았던 벼락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라 때도 황룡사가 여러 차례 벼락을 맞아 수리했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는가. 인근에 고인돌이 많았는지, 황룡사의 초석으로 잘려서 사용된 것도 알게 됐다. 청동기 때의 고인돌이 신라에 와서 초석으로 사용되니 모든 것이 순환한다.
철마다 제비꽃과 민들레, 개망초와 주황색 코스모스가 초석 사이로 흐드러진 황룡사지는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고도 경주는 짓고 채울 것이 아니라 수도승처럼 비워야 한다. 비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황룡사의 주춧돌은 온몸으로 받들었던 무거운 기둥을 내려놓고 긴 안식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는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황룡사지를 찾아가 옛 선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가득히 비어 있어 늘 아름다운 이 유적지는 고고미술사학자를 시인으로 만든다.
황룡사지에서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하면서 그리움처럼 미륵삼존불을 떠올린다. 1925년 경주남산 북쪽 장창골의 한 석실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온 아기 부처 세 분이다. 의자에 걸터앉은 본존불은 조용히 눈을 내리뜨고 있으나 가지런히 떠오른 눈썹과 웃음을 문듯한 둥근얼굴, 옷주름을 쥐고 있는 손과 통통한 손바닥, 무릎을 강조한 타원형의 나선 등이 천진한 동자상 같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 보살은 머리와 키의 비례가 갓난아기의 사등신이다. 티없이 웃는 얼굴에 머리에는 넓은 관대를 두르고 양옆과 정면에 꽃 장식을 붙였는데 목에 걸린 꽃목걸이와 발밑으로 흐르는 천의가 축복의 모습이다. 연꽃 봉우리를 가슴에 올려둔 우협시 보살이 왼 무릎을 살짝 구부려 발끝을 들고 있는 모습은 더없이 사랑스럽다. “갑시다” 하고 두 아기보살을 양손에 잡고 집에 데려가 과자를 주고 싶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부드럽고 온화하게 표현한 것은 신라 특유의 조형”이라고 설명돼 있다. 삼국시대 삼존미륵불의 천진함, 그것이 한국의 원형이 아닐까? 한 시인은 경주 기행에 “영혼의 고향을 찾아온 이 몸의 향수”라고 썼다. 경주는 현실에 없는 내 영혼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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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석경
1974년 월간 〈문학사상〉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오랜 세월 경주에 머물며 축적한 시선과 감각을 토대로, 한국 문단에서 독창적인 문학적 세계를 형성해 왔다. -
사진. 조지영
© Shin Gyuchul
세계가 모이는 곳, 경주
APEC 2025 KOREA
신라의 고도 경주가 올가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의 무대가 된다.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이 도시는 공동체의 미래 설계를 담은 APEC의 비전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2025년 의장국인 한국은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장기 목표 실현을 위한 ‘지속 가능한 미래 건설: 연결, 혁신, 번영’을 주제로 경주에서 정상회의주간을 갖는다. 하이라이트인 APEC 정상회의는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며, 각국 장차관과 기업 리더들이 한 곳에 모여 미래 의제를 논의한다.
경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경주는 석굴암, 불국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도시 곳곳에 자리한 한국 문화의 보루다. 마침 2025년은 석굴암과 불국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30주년이 되는 해로, 천년의 문화유산이 세계와 함께 걸어온 시간을 국제 무대에서 다시금 조명하는 셈이다. 이번 정상회의의 핵심 회의장은 보문관광단지 내 국제회의 복합지구에 위치한 경주화백컨벤션센터 ‘하이코(HICO)’로, 명칭부터 신라의 합의제 회의 문화인 ‘화백’에서 따왔다. 공식 만찬은 신라의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국립 경주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 HICO
역사와 미래의 가교
경주의 시간은 회의장 밖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주 회의장인 하이코가 위치한 보문관광단지 일대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이야기를 담은 초대형 알 조형물(높이 15m, 길이 11.5m)이 설치되며, APEC 참가 21개국의 기념 벤치와 수목 조명이 어우러진 자연 친화적 미디어아트가 밤을 반긴다. 문화예술 프로그램도 한층 다채롭다. 각국 정상들이 모이는 자리를 기념해 신라의 정상, 왕이 썼던 금관 6점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이는 〈신라 금관 특별전〉(가제)에서는 천년 전 왕실의빛을다시만날수있다.이외에도APEC 기간 전후로 ‘세계유산축전’(9.12~10.3), ‘경주 국가유산 야행’(9.26~9.28) 등 경주만의 색채를 가진 문화 이벤트가 도시 곳곳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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