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 October 2026 (Vol. 50 No. 05)

생각대로 되지 않아 좋은 날

<모닝캄>은 일상의 풍경에서 길어 올린 생각을 ‘옴니버스 스토리’를 통해 전합니다. 서로 다른 시선으로 쓰인 이야기들이 독자의 여정 속에 작은 생각 하나로 머물렀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꽃피우기를 바랍니다.

  • 백영옥은 사랑과 상실, 성장과 위로를 섬세한 문체로 그려온 소설가다.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스타일〉을 비롯해 〈애인의 애인에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아주 보통의 연애〉 등 다수의 소설을 펴냈다. 베스트셀러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빨간 머리 앤〉의 문장을 오늘의 삶으로 불러내며 많은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

오래전 읽은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인생이, 진짜 인생이 이제 곧 시작될 것이라 믿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글이다. 그는 앞에 놓인 장애물과 끝내야 할 일들, 갚아야 할 빚이 모두 지나가고 나면 진짜 인생이 시작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그 장애물 자체가 바로 자신의 ‘진짜 인생’이었음을.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내가 삶을 늘 예고편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편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첫 장소는 초등학교 도서관이었다. 내 친구는 책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외톨이였고, 자주 악몽을 꾸는 아이였다. 꿈속에서 학교 복도는 늘 끝없는 미로가 됐다. 문을 열면 또 복도였고, 모퉁이를 돌면 다시 같은 복도였다. 그 미로에서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이 도서관이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도서관으로 도망쳤다.
아홉 살, 그곳에서 앤을 만났다. 빨간 머리의 고아였고, 말이 많았고, 상상력이 지나쳤고, 자주 오해받는 아이. 나는 앤이 조금 부러웠다. 앤에게는 초록 지붕 집으로 데려다줄 마차가 있었다. 매슈와 다이애나가 있었고, 언젠가 길버트가 나타날 예정이었다. 책만 읽는 외롭고 뚱뚱한 내가 싫었다. 현실은 불편했고, 상상은 안전했다. 그래서 중학교에 올라간 후, 일부러 크게 웃고, 끝없이 말하는 법을 익혔다. 사립학교 특성상 나와 같은 중학교에 배정된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내가 낯을 가리지 않는 진행자 타입의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강연을 마치면 화장실로 숨어 들어가, 15분씩 눈을 감고 변기 뚜껑 위에 앉아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 방송이나 인터뷰를 하고 온 날에는 충전기를 꽂듯 종일 침대 위에 누워 있어야 했다. 최근에야 내가 ‘고기능 내향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오래도록 외향적인 역할을 잘 수행해서, 나조차 그걸 성격이라고 착각했던 사람.
하지만 그 가짜 활발함 사이에서도 진짜로 나를 사람들 곁에 앉힌 것이 있었다. 이야기였다. 대여점 로맨스 소설부터 할리퀸, 파라북스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가 정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졌을 때, 처음으로 ‘내가 쓰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만 나는 독자로서 ‘굶주려’ 쓰기 시작했다. 열네 살, 파란색 모나미 볼펜으로 바른손 노트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리 썼는지 노트 곳곳에는 파란 볼펜 똥이 가득했다. 그때의 나는 얼마나 쓰는 일에 몰두했던 걸까. 얼마나 공부와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었던 걸까.
한 권뿐인 노트는 친구들 손을 타며 점점 너덜너덜해지다가 결국 3단으로 분리됐다. 뒷얘기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을 위해 연사처럼 소설의 다음 부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첫 독자는 문예지 심사 위원이 아니라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나는 아직 길버트를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길버트 같은 남자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썼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지 않고, 오래 기다리며, 끝내 내 결핍을 끌어안는 이야기에 매혹됐다. 그때의 나는 이미 작가였다.
그러나 어른이 된 뒤 진짜 작가가 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문학 공모전에서 수도 없이 떨어졌다. 10년의 시간이 지나 백번쯤 떨어지자, 낙선이 직업처럼 느껴졌다. 오지 않는 당선 전화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게 내 진짜 인생일 리 없다고. 진짜 인생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각대로 되지 않던 일이 길을 열었다. 마침내 신인 문학상을 받았을 때, 나는 멋진 수상 소감 대신 내가 떨어졌던 공모전들의 목록을 썼다. 굳이 실패의 역사를 왜 쓰냐고 남편이 말렸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정확한 이력서처럼 느껴졌다. 우습게도 그 낙선기가 한 문학 담당 기자의 눈에 띄어 신문 지면이 생겼다. 내 인생에서 처음 열린 문은 승리의 문이 아니라 실패의 목록을 정직하게 펼쳐놓은 자리였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장애물이라고 부르던 것들이야말로 내 진짜 문장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프린스에드워드섬은 아홉 살 무렵 도서관에서 시작된 나의 30년짜리 버킷 리스트였다. 너무 멀어서, 비싸서, 일이 생겨서, 수도 없는 피치 못함 때문에 닿지 못한 섬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섬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을 때, 그곳이 내 상상보다 훨씬 더 먼 곳이란 걸 깨달았다. 토론토까지 가고, 다시 핼리팩스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
핼리팩스에서 버스를 타고 컨페더레이션 다리를 건너 프린스에드워드섬에 도착했다. 샬럿타운의 첫인상은 소박하고 조용했다. 소설 속 앤에게는 눈부신 도시였지만, 실제 샬럿타운은 크고 복잡하기보다 다정하고 아담해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거리에는 〈앤과 길버트〉 뮤지컬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기념품 가게에는 앤의 얼굴과 문장이 가득했다. 온 섬에 꽃가루가 눈처럼 날렸다. 겨울의 눈이 아니라 봄이 장난스럽게 흩뿌리는 눈처럼 느껴졌다. 보라색, 분홍색, 흰색의 꽃들이 섬 전체를 파고들었다. 누군가 ‘루핀’이라는 꽃 이름을 말해줬을 때, 속으로 마술사 이름 같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초록 지붕 집에 도착했을 때, 전 세계에서 온 앤의 팬들이 보였다. 백발의 앤, 검은 머리 앤, 금발의 앤. 국적은 알 수 없었지만 모두 자기 안의 앤을 데리고 이곳까지 온 사람들이었다. 어떤 중년 여성은 앤의 옷을 입고 집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이내 웃음이 났고, 이상하게 뭉클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자기 안의 소녀를 간직하고 사는구나. 다만 평소에는 그 소녀에게 입힐 옷이 없을 뿐이었구나.
초록 지붕 집의 문을 열었을 때, 집이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헛웃음이 났다. 집이 작은 것인지, 내가 너무 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깐 거인국의 걸리버가 된 기분이었다. 허리를 숙여야만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상하게 그 점이 좋았다. 이렇게 작은 집에서 앤은 그렇게 큰 상상을 했구나. 작은 방에서 큰 이름들을 만들었고, 낮은 지붕 아래서 높고 너른 말을 배웠구나. 사람의 상상력은 넓은 곳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낮은 천장과 좁은 방, 자주 부딪히는 현실 때문에 더 멀리 뻗어나간다.
가장 놀랐던 건 초록 지붕 집 마당 바로 옆에 골프장의 초록 잔디가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린 게이블스 골프 클럽. 80년 넘은 골프장이라고 했다. 깔깔깔, 웃음이 터졌다. 세상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우리가 오래 사랑한 환상 옆에는 꼭 현실의 골프 카트가 지나간다. 깃발이 꽂혀 있고, 누군가 퍼팅을 하고, 누군가는 관광 기념품을 산다. 동화는 현실을 이기고 서 있는 게 아니라 현실과 나란히 낡아가고 있었다.


나는 ‘연인의 오솔길’을 걷고, 앤과 다이애나가 상상으로 만든 ‘유령의 숲’을 지나갔다. 숲 아래로 개울이 낮게 반짝였고, 붉은 흙길 끝마다 초록 들판과 강이 번갈아 펼쳐졌다. 몽고메리가 외할머니를 도와 우편 일을 했던 캐번디시의 옛 우체국에서 엽서 한 장을 써 한국으로 보냈다.
행복한 며칠이었다. 그런데 섬을 떠날 때는 섭섭하기보다 편안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내 침대, 내 책상, 내가 매일 쓰는 컵, 별것 아닌 소박한 저녁. 앤도 그랬다. 조세핀 배리의 초대로 샬럿타운에 머물며 전시회와 콘서트, 밤늦은 아이스크림까지 누린 뒤에도 앤은 집으로 돌아와 말한다. 가장 좋았던 건 집으로 돌아온 일이었다고. 화려한 도시의 며칠보다 동쪽 박공 방에서 잠들며 창밖의 별과 전나무 사이 바람을 느끼는 일이 더 자기답다는 걸 앤은 알고 있었다.
앤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여행은 멀리 떠나 진짜 나를 찾는 일이 아니라 치열하게 사느라 잊어버린 나에게 돌아오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게 여행은 ‘떠나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물론 우리는 계속 떠날 것이다. 비행기나 버스, 기차를 타고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여권이 필요 없는 여행도 있다. 동네 산책, 오래 미뤄둔 서랍 하나를 여는 일, 아침에는 보지 못한 가게를 저녁 퇴근길에 발견하는 일. 지하철 공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낯선 뒷길로 돌아가다 전봇대에 붙은 꽃 수업 전단지 앞에서 멈춰 선 내 친구처럼, 어느 반복되던 하루에서 진짜 여정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렇게 친구는 결국 영국으로 건너가 플로리스트가 됐다. 앤의 마음을 잊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든 모험가가 될 수 있다. 앤이 말했다.
“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니까.”
이제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외로운 도서관의 아이, 파란 볼펜으로 도망치듯 소설을 쓰던 여학생, 백번 넘게 떨어진 작가 지망생, 화장실 칸에서 숨을 고르던 강연자 그리고 마침내 작은 초록 지붕 집 앞에서 거인이 된 것 같아 웃던 중년의 여자. 그 모든 순간이 나였다. 그 모든 장애물이 내 인생이었다. 그러니 늙지 않는다는 건 젊은 얼굴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대로 되지 않는 삶을 아직도 모험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인지 모른다. 우리 안에 그런 마음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 앤이다. 빨강머리 소녀의 영혼을 품은 채, 오늘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여행자다.
한참 뒤, 내가 캐번디시의 우체국에서 보낸 엽서가 도착했다.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쓴 편지였다. 그 편지를 읽던 밤, 나는 다시 프린스에드워드섬으로 가는 꿈을 꿨다. 여행은 집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 글.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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