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동, 서울의 북쪽 곳간
양곡 창고에서 준공업지역을 거쳐 문화의 아카이브가 된 창동. 서울의 북쪽 곳간은 이미지와 데이터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저장하는 도시로 변화하고 있다.
창동의 ‘창(倉)’은 창고를 뜻한다. 조선시대 양곡을 보관하던 곳간이 있던 이곳은 오래도록 무언가를 저장해 온 동네였다. 신석기시대 유물의 발견부터 수많은 역사가 보관된 창동은 이제 이미지와 데이터를 축적하고, 새로운 K-컬처를 통해 세계와 연결된 도시로 변화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호기심
곳간이 있던 마을은 이제 미래를 축적해 간다. 빌딩과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자리한 돔 형태의 건축물,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Seoul RAIM)은 오늘날 창동의 변화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인간과 로봇, AI가 공존하는 미래를 주제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관람객은 평소 접하기 어려운 첨단 기술과 직접 교감할 수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로봇을 만지는 아이들과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어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로봇 개와 로봇축구 대회 우승자인 휴머노이드 로봇 ‘앨리스’, 실제 의료 현장에서 활용되는 수술 보조 로봇 ‘다빈치’와 로봇이 연주하는 싱잉볼까지 다양한 기술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순간, 곡식을 쌓아두던 창동에는 이제 미래 기술뿐 아니라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의 호기심도 함께 쌓여간다.
창작의 도시
창동의 호기심은 예술과 창작으로도 이어진다. 그 시작은 2002년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와 함께 문을 연 팔각정 창작스튜디오의 등장과 함께, 국내에서는 도심 속 유휴공간을 예술가의 작업실로 되살리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불타버린 하나로마트 창고 부지를 매입해 새롭게 조성한 창동레지던시는 오랜 시간 한국 현대미술의 앵커 역할을 해왔다.
매년 공모로 선발된 국내외 유망 작가들은 이곳에서 작업하며 작품을 발전시킬 기반을 다진다. 평소 닫혀 있던 레지던시의 문이 시민들에게 열리는 오픈스튜디오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캔버스와 설치 작업, 작가의 메모가 남아있는 작업 공간을 둘러보며 작품이 완성돼 가는 과정을 직접 살펴볼 수 있다.
약 10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탄생한 국내 유일의 사진 특화 공립 미술관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Photo SeMA)은 도시의 창작열이 살아 있는 또 다른 공간이다. 2015년 서울시의 ‘박물관·미술관 도시 서울’ 계획을 바탕으로 2025년에 개관한 이곳은 한때 공장과 창고, 물류와 교통이 집결한 산업지역이자 베드타운으로 인식되던 창동을 차세대 문화 도시로 만들었다.
카메라 조리개를 형상화해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구현한 사진미술관은 외관에서부터 사진의 원리를 건축적 언어로 풀어낸다.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는 내부에는 전시장뿐만 아니라 전문 인화 장비를 갖춘 암실 등을 마련하고 사진을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을 안내한다. 4층의 포토라이브러리에서는 사진·미술·디자인 관련 서적과 전시에 연계된 작가들의 사진집을 열람할 수 있다. 먼저 전시를 본 관람객은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다시 작품을 들여다본다. 즉 전시는 전시장에서 끝나지 않고, 책장을 따라 또 다른 감상으로 이어진다.
내일을 축적하다
K-팝 중심 음악 전문 공연장인 서울아레나의 2027년 개관을 앞두고, 창동은 음악인들의 활동과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는 음악 도시로서의 기반도 마련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도봉구가 운영하는 청년 신진 음악 플랫폼 OPCD(오픈창동)가 있다. 장르와 경력에 관계없이 음악인의 성장 과정을 단계별로 지원하는 전문 시설을 갖춘 곳이다. 그중 지하철 1·4호선 창동역 1번 출구 인근에 위치한 OPCD 바이닐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이다. 약 1100장의 LP가 구비된 이곳에서 시민들은 자신이 원하는 LP를 골라 턴테이블에 올리고 스피커나 헤드폰으로 음악을 감상한다. 때로는 신진 음악인의 음원 발매를 기념하는 감상회도 열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역 주변에서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OPCD 바이닐에서 15분만 걸으면 빈티지한 자개장으로 장식된 독립 서점 ‘책가도’에 다다른다. 서점 주인이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자개장에는 사진과 예술 관련 서적이 빼곡히 진열돼 있고, 독립 출판물과 사진 소품도 함께 구경할 수 있다.
음악과 책이 만든 감성의 흐름은 초안산 자락까지 이어진다. 창동역 인근의 초안산근린공원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초안산가드닝센터는 온실과 정원사의 작업실, 초록책방과 예술공방을 모은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에서 방문객은 식물을 심거나 초벌 도기에 그림을 그려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맞은편 초안산 목재문화체험장에서는 톱과 대패를 쥐고 화분 받침이나 수납장 같은 소품을 직접 만들어보기도 한다.
LP를 고르고, 책장을 넘기고, 식물을 심는 일은 언뜻 서로 다른 경험처럼 보이지만, 모두 창동이 오래전부터 문화를 키워온 방식이다. 무언가를 저장하고 다시 나누는 곳간의 일처럼 도시 곳곳에 쌓인 문화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퍼져나간다.
시간을 다시 쓰다
창동이 쌓아온 시간은 앞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과거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이곳은 1911년 경원선 개통을 통해 경성(현 서울)과 연결되며 도시의 시간과 이어졌다. 함석헌, 전태일, 김수영, 김근태 등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들이 머물렀던 도봉구 일대에는 오늘날 이들의 이름을 단 기념관과 문학관, 도서관이 자리하며 한 시대의 기억과 정신을 보존하고 있다. 창동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사라질 뻔한 과거의 흔적을 현재의 문화창작공간으로 되살린 평화문화진지를 만날 수 있다. 1970년에 지어진 도봉구 최초의 시민아파트는 전체 4층 규모로, 1층의 대전차방호시설과 2~4층의 주거 공간을 결합한 복합 건축물이었다. 일부는 철거됐지만, 핵심 시설이었던 방호벽은 기존 구조를 유지한 채 입주 작가와 전시를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짙은 갈색 패널 뒤에 남겨진 콘크리트 기둥과 끊어진 계단, 소총 거치대 등은 방문객을 자연스럽게 오래된 역사 속으로 이끈다. 부지 안쪽에 세워진 전망대에 오르면 도봉산과 대규모 원형 공연 시설인 평화울림터가 어우러진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과거의 흔적 위에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역사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덧입힌 평화문화진지의 변화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지금의 창동과도 맞닿아 있다. 축적된 기억을 꺼내 오늘의 문화로 이어가는 창동은 창작과 기술, 일상이 함께 성장하는 서울의 북쪽 미래 곳간이 돼가고 있다.
- 글. 복정윤
- 사진. 장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