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학, 차경
한국인의 정서에 깔린 미적 개념을 들여다보고,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살펴보는 세 번째 주제는 ‘차경’이다. 차경은 창과 문 너머 자연을 끌어들여 내 공간처럼 품는 감각을 의미한다. 한국의 차경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기보다, 그 자체를 존중하며 조심스럽게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는 미의식이다.
- Gradation K는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과 멋이 깃든 미의식을 오늘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칼럼이다. 세 번째 주제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미감, ‘차경(借景)’이다.
자연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국 정원의 미학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고, 제일 오랜 기간 왕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 동쪽에 있어 동궐(東闕)이라고도 부르는데, 자연적인 지형을 잘 살려서 건물을 배치했다.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정궁 역할을 했고, 한때 창덕궁 후원을 ‘비원’이라 부를 정도로 정원이 아름다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됐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오래전 일본의 조경 관계자들이 창덕궁의 정원을 보러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안내에 따라 창덕궁과 그 후원을 둘러보며 한창 경관에 감탄하고 나서 “그런데 정원은 대체 언제 보여줄 거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자연을 대하고 정원을 꾸미는 태도의 차이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생각된다.
사람의 공간에 자연을 담는 일, 조경(造景)은 말 그대로 ‘경치를 만든다’는 뜻이고 차경은 ‘경치를 빌린다’는 뜻이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는 한자문화권이라는 문화적 동질성을 갖고 있다. 서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접촉이 많다 보니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레 문화가 섞이게 됐고,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많다.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원에 대해 간단히 구분해 설명하자면, 중국의 정원은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명확하다. 잘 짜인 드라마처럼 스토리가 명확하고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뚜렷하다. 예를 들면 어떤 장소에서는 달을 봐야 하고 어떤 장소에서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자연을 즐겨야 하고 등등. 한편 일본의 정원은 정교하게 축소한 작은 자연처럼 꾸며놓는다. 마치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아름다움을 완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경계를 절대 넘지 않는다.
그에 비해 한국의 정원은 ‘애매함’을 주제로 삼은 듯 정원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그 프로그램 역시 불분명하다. 과연 어디서부터 정원인지, 그 정원에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런 방향 제시가 없다. 마치 열린 결말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독자가 되는 것이다.
사실 외부공간을 다듬고 꽃을 가꾸고 나무를 심는 일은 사람이 또 하나의 자연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방식은 자연을 축소하거나 사람이 만들어놓은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건축에 스며들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둔다. ‘차경’이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자연의 경치를 빌리되 액자에 가두고 ‘이만큼의 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내부로 스며들고 내부가 자연으로 슬그머니 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찌 보면 유한한 건축에 영속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담양 소쇄원은 자연과 사람, 자연과 건축 간의 경계가 모호한 한국 정원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양산보(호가 ‘소쇄옹’이다)에 의해 16세기에 조성된 소쇄원은 얼핏 보면 소박한 대숲을 지나 나타나는 계곡을 사이에 둔 어느 산속 한 귀퉁이 같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의미와 풍경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매혹시켜, 김인후 같은 학자는 〈소쇄원 48영〉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눈에 들어오는 소쇄원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느릿하게 지나는 흙담이 보인다. 담은 보통 경계를 짓기 위한 것이지만 소쇄원의 담은 그저 안과 밖이 연결되는 공간 장치일 뿐이다. 입구에서 담을 끼고 밖으로 돌든 안으로 돌든 결국 안채 격인 제월당으로 연결된다. 즉 소쇄원의 담은 구분하고 막는 담이 아니라 안팎을 엮고 길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연결된다. 그리고 자연 지형을 이용한 공간은 지루할 틈 없이 연속된다. 그렇게 담을 따라 돌다 보면 사람들은 어느새 처음 발을 디딘 장소로 돌아오게 된다. 경계가 없는 공간, 즉 경계 너머의 자연을 끌어들인 뒤 의미를 조합해 만드는 창조적인 공간으로서 한국 정원이 지닌 미학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 글. 노은주 / 사진. 이동춘
- 노은주는 건축가이자 가온건축 공동대표다. ‘가온’은 순우리말로 ‘가운데’라는 뜻과 한자로 ‘집의 평온함(家穩)’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가장 편안하고, 인간답고, 자연과 공존하는 집을 만들고자 한다. EBS 교양프로그램 〈건축탐구-집〉에 출연하며 집의 의미와 중요성을 상기하게 했으며, 〈사람을 살리는 집〉, 〈나무처럼 자라는 집〉 등의 저서를 공동 집필했다.
마음에 차경을들이는 법
템플스테이와 ‘차경’의 만남
차경은 자연의 풍경을 ‘빌려와’ 자신의 공간 안에 들이는 한국 전통의 미학이다. 정원을 조성하면서 인공적으로 자연을 흉내 내기보다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 나무, 바람결까지 그대로 끌어들인다.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기보다,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태도. 한국의 전통 건축과 정원은 이 차경의 철학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됐고, 바라보는 이의 마음은 그 안에서 조용히 정돈되곤 했다.
이러한 차경의 미학은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경험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산사의 새벽 공기, 창문 너머 솔숲의 그림자, 물소리와 풍경. 그것들은 단순한 자연의 배경이 아니라 수행자의 내면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절 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바깥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을 빌려 마음 안에 들이고 있는 셈이다.
현대인의 뇌와 마음은 늘 과열 상태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생각과 감정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것, 바로 ‘멈춤’이다. 정신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브레이크를 걸 만한 공간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쉼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주목받는 것이 바로 템플스테이다. 한때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요즘의 템플스테이는 다르다. 자연과 고요, 사색과 휴식을 담은 ‘K-템플스테이’는 외국인들에게도 인기다. 특히 여름의 템플스테이는, 차경의 철학을 가장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다.
K-템플스테이의 진화
전통적 수행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K-템플 스테이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서핑과 단식, 무술 수련은 물론 반려견과의 교감까지 아우르며 이전과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단순한 ‘절 체험’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쉼과 회복 그리고 관계의 전환을 제안한다. 당신의 마음에 차경을 들이는 특별한 K-템플스테이를 소개한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곳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로
통일신라시대 의상 대사가 창건한 곳이다. ‘서핑 템플스테이’라는 파격적인 콘셉트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이 천년고찰은 요동치는 내면의 파도를 서핑과 수행을 통해 조용히 들여다보게 한다. 경기도 양주시의 육지장사는 몸을 먼저 비우는 데 집중한다. 이곳은 단식을 중심으로 한 템플스테이로, 사과 · 당근주스와 쑥뜸, 백팔배, 산길 원행 등으로 구성된 일정은 몸의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마음까지 비워내는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단전에 쑥뜸을 얹고 체온을 끌어올리는 시간은 단순한 건강 요법을 넘어 내면의 정화를 이끄는 독특한 힐링법이다.
보다 역동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경주 골굴사로 향해보자.
‘한국의 소림사’로 불리는 이곳은 선무도의 본산으로, 전통 무술을 통해 정신과 육체를 함께 단련하는 템플스테이다. 주상절리 절벽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수련, 수련 뒤 바닷물에 뛰어드는 짜릿한 순간은 몸과 마음이 함께 깨어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리고 반려견과 함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이색 템플스테이도 있다. 충북 증평의 미륵사는 ‘댕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당일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한다. 견주와 반려견 모두 사찰복으로 갈아입은 뒤 함께 사찰을 걷고, 스님과의 차담 시간에는 ‘견생 상담’을 진행한다. 반려견을 향한 깊은 교감을 권하는 스님의 따뜻한 조언은 마음에 울림을 남긴다. 절에서 실제로 거주 중인 반려견 ‘석화엄’과의 만남은 이 프로그램의 백미다.
- 글. 신익수
- 신익수는 〈매일경제신문〉 기자로 특히 국내외 여행지와 전통문화, 현대적 감성의 접점을 탐구하는 칼럼과 기획기사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K-템플스테이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 〈절로 힐링〉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