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서정, 이문세
라디오와 음악, 1980년대의 감수성을 지배하다
1980년대를 추억해 본다. 수많은 스타가 그 시절을 수놓았지만 ‘감성적인’ 측면에서 나를 지배한 가수는 오직 한 명, 이문세였다. 심지어 그가 당대 대중의 감수성을 사로잡은 방식은 음악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탁월한 라디오 DJ이기도 했다. 이것은 과찬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당시 주변에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애청하지 않은 친구는 거의 없었다. 주파수를 맞추고 그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듣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아침 라디오에서는 다른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별 관심 없었다. 배철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문세는 나에게 라디오와 거의 동격인 인물이었다.
사촌 형과의 에피소드를 언급해야 마땅하다. 나는 방학이 되면 내가 살았던 동부이촌동에서 청량리로 향하는 국철을 탔다. 그렇게 사촌 형 집에 가서는 일주일 내내 같이 놀았다. 사촌 형과 오락실에 가서 놀고, 놀이터에서 놀았다. 아무튼 계속 놀았다. 밤이 되면 이모가 끓여준 라면을 먹으면서 이문세의 노래를 함께 들었다. 그 추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 이문세의 3·4·5집 앨범은 하도 많이 들어서 지금도 수록곡 전부를 순서대로 외울 수 있다. 이렇게,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음악 애호가에게 이문세의 음악은 정서적 이정표와도 같았다.
한국 팝 발라드의 새로운 시대
이문세의 역사를 논할 때,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그와 작곡가 이영훈의 만남을 빼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가장 찬란하고도 필연적인 빅뱅이었다. 1983년 발표한 정규 데뷔앨범과 그다음 해에 발표한 2집을 통해 촉망받는 신인이자 유능한 방송인으로 자리 잡아가던 이문세는 이영훈이라는 천재적인 멜로디 메이커를 만나며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음악적 영토를 발견한다.
그 서막을 연 작품이 1985년 발표한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다. 타이틀곡의 폭발적인 히트는 시작에 불과했다. 뒤이어 등장한 4집 〈사랑이 지나가면〉(1987)은 한국 팝 발라드의 정석으로 꼽히며, 당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285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음악적 정점이자 한국 대중음악 명반 리스트의 최상단을 차지하는 5집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1988)에 이르러 이문세는 가요계의 패러다임을 통째로 바꿨다. 단 세 장의 앨범으로 그는 대한민국 음반시장의 판도를 뒤흔드는 절대적인 거장으로 우뚝 섰다. 이문세와 이영훈이 창조해 낸 세계는 그 이전의 대중가요와 명확히 궤를 달리했다. 전형적인 신파나 투박한 통기타 정서에 기대던 기존 가요계에 이들은 클래식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세련된 팝 사운드 그리고 한 편의 시와 다름없는 노랫말을 이식했다. 그것은 절제됐기에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도시적 서정성’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문세의 담백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보컬은, 이영훈이 그린 정교한 수채화 위에 가장 완벽한 색을 입히는 붓이었다. ‘난 아직 모르잖아요’, ‘소녀’, ‘휘파람’,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광화문 연가’ 등.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아리는 이 명곡들은 단순한 유행가가 아니라 우리 세대의 감정적 DNA에 각인된 세월의 배경음악이 됐다.
그 시절, 이문세는 밤과 낮, 음반차트와 라디오 주파수 모두를 장악한 시대의 유일무이한 지배자였다. 낮에는 길거리의 모든 레코드 가게에서 그의 새 앨범 수록곡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고, 밤이 되면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은 수백만 청소년의 지친 밤을 위로했다. 매일 밤 주파수를 맞추게 하던 그의 따뜻한 오프닝 멘트와 시그널 음악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가장 아늑한 도피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디오 DJ로서의 이문세는 음악인 이문세만큼이나 거대하고 독보적인 존재였다.
추억에 머물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이문세
그러나 그의 바이오그래피가 단지 1980년대의 영광스러운 박제에 그쳤다면 지금처럼 위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세기가 바뀌고 음악 트렌드가 급변하던 2000년대에도 이문세는 여전히 유효한 현재진행형의 거장이었다. 2001년 이영훈과의 마지막 작업이었던 13집 타이틀곡 ‘기억이란 사랑보다’로 가슴 먹먹한 발라드의 정수를 보여준 그는 2015년 발표한 15집 〈NEW DIRECTION〉에서 한층 힘을 빼고 편안해진 목소리로 대중에게 다가왔다.
2006년 드라마 OST로 발표된 ‘알 수 없는 인생’의 메가 히트 역시 그가 여전히 시대와 호흡하고 있음을 증명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경쾌한 리듬 위에 던져지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라는 노랫말은 1980년대에 그와 함께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는 중년의 위로가 됐고,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한 인생의 찬가로 다가갔다. 그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매번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관통하는 법을 알고 있는 가수다. 여기에 바로 이문세라는 가수의 진가가 존재한다. 그가 방송 연예계에 데뷔한 1978년 이후 시간이 5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이문세가 한국 대중음악사에 새겨놓은 서사는 여전히 빛이 바래지 않은 채 흐르고 있다. 수많은 후배 가수가 그의 노래를 끊임없이 리메이크하며 경의를 표하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는다. 이문세는 단지 한 명의 위대한 스타가 아니라, 우리가 통과해 왔고 또 앞으로 살아갈 모든 시간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배순탁이 추천하는 이문세의 곡들
소녀 (1985)
이영훈의 유려한 선율과 이문세의 맑은 미성이 만나 탄생한 한국 팝 발라드의 정석이다. 화려한 기교 없이 덤덤하게 읊조리는 보컬을 통해 이문세는 듣는 이의 마음속 가장 순수했던 시절 첫사랑을 자연스럽게 소환한다. 세련된 편곡과 서정적인 노랫말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시대의 마스터피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1988)
1980년대 이문세가 도달한 음악적 정점이자 ‘도시적 서정성’이 무엇인지를 소리로 증명한 노래. 쓸쓸하게 떨어지는 피아노 선율 위로 흐르는 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인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절제된 감정으로 슬픔을 담아내는 그의 보컬이 가장 극대화된 곡이다.
알 수 없는 인생 (2006)
1980년대의 영광에 머물지 않고 2000년대의 대중과도 완벽히 호흡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사운드 위에 얹힌 삶과 사랑에 대한 질문은, 청춘을 지나 인생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세대에게 따뜻하고 유쾌한 위로를 선물한다. 여전히 그가 현재진행형의 거장임을 웅변하는 명곡.
PREVIEW
CORTIS, GREENGREEN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일상을 담아낸 코르티스의 두 번째 미니앨범. 신호등의 초록과 빨강을 곡의 가치관 메타포로 끌어와 그룹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경계를 드러낸다. 작사 · 작곡과 안무 전반에 멤버 모두가 참여한 만큼 진정한 자기표현 의지가 앨범 곳곳에 배어 있다.
Taylor Swift, RED (Taylor’s Vesion)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신의 손을 떠났던 이야기를 되찾기 위해 2012년의 이별을 다시 처음부터 써 내려간다. 2019년 발생한 마스터권 분쟁 이후 시작된 재녹음 프로젝트의 두 번째 결과물인 이 앨범은 원곡 복원을 넘어 당시 담지 못했던 아홉 개의 미공개 곡을 새로 얹었다. 확신과 여유로 스물두 살의 격정을 다시 쓰며, 그 시절을 온전히 끌어안는 앨범이다.
Olivia Rodrigo, You Seem Pretty Sad for a Girl So in Love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세 번째 정규앨범은 사랑이라는 하나의 감정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흔들리며, 어떻게 끝나는지를 따라간다. 한 관계의 전 생애를 순서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앨범은 로드리고의 표현대로 ‘사랑을 양면에서 담아내려는 시도’ 속에서 희망과 실망, 광기와 명료함을 내뿜는다.
Miles Davis, Kind of Blue (Legacy Edition)
1959년 발매된, 재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음반으로 꼽히는 〈Kind of Blue〉의 확장판.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 에번스를 비롯한 재즈의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해진 코드 대신 ‘모드(선법)’로 연주했다. 원곡 다섯 트랙에 얼터네이트 테이크와 미공개 시퀀스, 1958년 세션까지 담아 걸작의 탄생기를 들려준다.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 Carlos Kleiber, Beethoven: Symphonies Nos.5&7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역대 최고의 명지휘자 반열에 올려놓은 음반으로, 베토벤의 두 교향곡이 가진 웅장함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연주를 펼친다. 두 곡 모두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대체할 수 없는 음악적 기준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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