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 October 2026 (Vol. 50 No. 05)

맥락을 지운 공간, 〈백룸〉

초고속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된 2000년 무렵부터 우리는 두려움 섞인 호기심을 품게 됐다. 디지털 기기를 지척에 두고 자란 아기들이 성인이 되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Z세대, 이른바 젠지 예술가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우리가 알던 방법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이 비행기의 기내 엔터테인먼트에서 ‘신인류’의 영화 한 편을 확인할 수 있다.

〈백룸〉은 유튜브와 같은 해에 태어난 2005년생 케인 파슨스 감독의 데뷔작이다. 원안부터 ‘인터넷 오리지널’인 이 영화는 2019년 ‘4chan’이라는 사이트에 미국 위스콘신주의 텅 빈 상점 사진이 업로드되면서 시작됐다. 많은 네티즌이 비슷한 이미지를 올리며 타래를 이루고, 수차례 ‘복사와 붙이기(카피 앤드 페이스트)’가 이어지며 이른바 온라인 도시 전설인 ‘크리피파스타’로 번졌다. 당시 케인 파슨스 역시 그 이미지를 접했다. 그는 코로나19로 학교를 가지 않던 기간 동안 블렌더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1인칭 시점의 호러 영상 시리즈를 만들었다. 기묘한 빈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담긴 영상은 유튜브에서 2주 만에 20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이제 개성적인 호러영화 명가로 정평이 난 제작사 A24를 통해 관객 앞에 등장했다.

〈백룸〉의 주인공 클라크(추이텔 에지오포)는 좌절한 건축가로 ‘캡틴 클라크의 오토만 제국’이라는 가구 할인점을 운영한다. 해적 선장으로 분장해 우스꽝스러운 TV 광고까지 찍으며 홍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데도 여전히 손님은 없고, 술 문제로 아내에게 내쳐지기까지 해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울분을 간직한 클라크는 심리상담사 메리(레나테 레인스베)를 주기적으로 찾는다. 한편 심리상담사 메리의 마음에도 심연이 있다. 창문을 온통 가리고 어린 딸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감금했던 어머니에게서 받은 정신적 학대는 그녀에게 여전히 악몽이다.

술로 잠을 청하던 어느 밤, 클라크는 우연히 가게 지하층 벽에서 틈을 발견하고는 그 속에서 개미굴처럼 무한히 이어지는 거대한 방들을 본다. 마치 미친 건축가의 작품처럼 비례와 스케일, 문과 통로의 위치가 어긋나 있는 이 공간에는 현실에서 버림받은 듯한 가구들이 쌓여 있는가 하면, 정체 모를 존재의 기척이 어른거린다. 밤바다 ‘백룸’을 탐험하며 그 공간에 매혹된 클라크는 메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자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가게 직원들과 카메라를 들고 백룸으로 들어간다. 얼마 후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클라크의 자동응답기 메시지를 받은 메리는 가구점의 문을 두드린다.


쓰지 않는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사무실이나 영업장은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백룸〉 속 그저 빈 방과 복도들이 그토록 섬뜩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컨 화가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빈 방은 고독하지만 그곳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간 누군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체온이 잔존하는 호퍼의 빈 방에는 바람과 햇볕을 들이는 창이 있다. 사랑해서 함께 살았고 사랑이 다해 헤어지는 연인의 이야기를 그린 하라 히데노리의 만화 〈내 집으로 와요〉의 엔딩 역시 인물 없는 빈 방의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없이 비워진 방들은 공허하지만 거기엔 여전히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떠다닌다. 왜 어떤 빈 공간은 멜랑콜리를, 어떤 빈 공간은 호러를 불러오는가.

〈백룸〉의 광대한 빈 방에 결여된 것은 맥락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노란 방과 그곳에 놓인 사물은 현실이 아니라 기억할 때마다 왜곡되고 흐려지는 잔상이기 때문이다. 팔리지 않은 가구 더미가 암시하듯이 이 공간은 한 남자의 실패와 울분을 기념비처럼 전시하는 전당이다. 클라크를 찾아온 메리가 본 허수아비들도 마찬가지다. 아내를 비롯해 클라크의 인생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했던 타인들은 백룸 안에서 전부 허수아비가 됐다. 클라크는 제멋대로 잡아 뜯고 살점까지 먹을 수 있는 복제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남자가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메아리방(에코체임버)은 그렇게 이어진다.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인물은 스스로를 가두는 데에 그치지 않고 타인까지 위협한다.


〈백룸〉을 Z세대와 연관 짓는 이유는 비단 감독의 나이에만 있지 않다. 감독이 프로덕션 디자이너와 함께 창조한 세트장은 퇴락한 사무실과 쇼핑몰을 닮았다. 1990년대 청춘영화에서 젊은이들의 소비와 교류의 장이었던 대형 쇼핑몰이 21세기 디지털 상거래에 의해 문화적 잔해가 된 것을 상징하듯이, 그곳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서사 기법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클라크가 신비한 현상에 휘말린 관찰자에서 빌런으로 뒤바뀌는데, 이 중요한 대목을 보여주지 않고 메리의 시점으로 갈아탄다. 3막 구성에서 2막이 생략된 듯한 전개다. 단순히 신인 감독의 미숙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단선적으로 장편 서사를 따라가기보다 댓글과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사방으로 이야기를 증식시키는 인터넷 세대의 습성과 연결할 수도 있다. 영화의 짜임새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마치 뒤 페이지를 뜯어낸 책처럼 끝나는 〈백룸〉의 엔딩은 속편 제작을 염두에 둔 상업적 열린 결말과는 조금 다른 맛을 남긴다. 불만족과 미완성을 그대로 두는, 그래서 무한한 정보를 뒷배로 언제든 이야기를 고쳐 쓸 수 있다고 믿는 세대의 태연함이 거기에 있다.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담담하게 말한다. “나는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싶다. 내가 하는 내 삶의 여러 일을 정리해 나가는 하나의 방식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함께_보면_좋은_영화

샤이닝 (1980)

인물의 심리가 장소에 반영된 공간호러의 고전이다. 글쓰기의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눈에 갇힌 채 고립된 호텔에서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 가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쌍둥이 소녀가 등장하는 장면과 문을 부수고 희생자를 위협하는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들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인용된다.

세브란스 (2022~현재)

애플 TV+ 오리지널 시리즈로, 거대 기업이 직원들의 직장 내 기억과 사생활의 기억을 완전히 분리하는 ‘세브란스’ 수술을 시행한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이 프로그램에 자원해 두 개의 인격으로 나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새하얀 복도와 창문 없는 사무실은 현대 기업의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8번 출구 (2025)

동명의 인디 공포 게임 원작의 영화. 한 청년이 도쿄 지하철역 8번 출구로 나가려 하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고 모퉁이만 끝없이 이어진다. 반복되는 지하도 안에서 공간의 규칙을 찾아내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게임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불안으로부터의 회피가 더 큰 불안을 몰고 올 수 있음을 시사하는 현대인의 자화상 같은 영화.

옵세션 (2025)

1999년생 유튜버 출신 커리 바커 감독의 Z세대 호러영화. 소심한 청년이 주술의 힘으로 짝사랑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지만 마법에 걸린 상대의 사랑은 스토킹과 폭력에 가까워진다. 내면에 갇힌 진짜 자아와 주술이 야기한 행동을 분열적으로 표현하는 배우 인디 나바레트의 연기가 〈겟 아웃〉에서 베티
가브리엘이 보여준 명연기에 버금간다.


MOVIE PREVIEW

#인생의_아이러니

마티 슈프림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꿈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거대한 청년 마티(티모테 샬라메). 그가 인생 역전을 위해 택한 무대는 뜻밖에도 탁구대다. 승리를 향한 집념이 점점 욕망과 집착으로 변해가는 가운데, 마티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들을 거듭한다. 조슈아 새프디 특유의 거칠고 감각적인 연출에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의 전자음악이 더해져, 한 청춘의 폭주를 숨 가쁘게 밀어붙인다.

머니볼

만년 저예산 약체 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이끌어온 단장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핵심 선수들을 잇달아 잃으며 궁지에 몰린다. 그는 유명세나 신체 조건 같은 기존 평가 기준을 과감히 뒤집고, 오직 출루율을 중심으로 선수를 선발하는 새로운 전략에 승부를 건다. 야구 영화로 시작해 혁신과 리더십 그리고 ‘남들이 틀렸다고 할 때 끝까지 밀어붙이는 법’을 이야기하는 실화 기반의 명작

파리의 사생활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는 전문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제대로 살펴본 적 없는 정신과 의사 릴리안(조디 포스터). 오래 담당한 환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의심한 그는 전남편까지 끌어들여 아마추어 탐정으로 변신한다. 사건을 파고들수록 드러나는 것은 환자의 비밀보다 자신의 오래된 사생활. 서늘한 미스터리와 능청스러운 다크 코미디 사이를 오가는 조디 포스터의 프랑스어 연기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망명 심사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이틀. 기니 출신 이민자 술레이만(아부 상가레)은 파리의 거리를 자전거로 질주하며 음식을 배달하고, 틈틈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면접을 준비한다. 영화는 그의 숨 가쁜 48시간을 바짝 따라붙으며 한 사람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붙잡기 위해 무엇을 견뎌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거창한 사건 없이도 인간의 존엄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

국보

야쿠자 두목인 아버지를 잃은 소년 기쿠오(구로카와 소야)는 운명처럼 가부키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리고 유명 가부키 배우의 양자가 된 뒤 혹독한 수련과 치열한 경쟁을 거쳐 마침내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 기쿠오(요시자와 료)로 성장한다. 화려한 무대 뒤의 욕망과 질투, 혈연을 뛰어넘는 사제의 인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가부키 공연을 객석에서 지켜보는 듯 몰입하게 된다.


#멜로와_눈물

© 2026 WBEI.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국에 정착해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리프)는 지역의 다리를 촬영하러 온 사진작가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단 나흘간의 만남은 두 사람의 삶을 영원히 바꾸지만, 결국 선택하지 못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남긴다. 세상을 떠난 프란체스카의 자녀들이 그녀의 일기를 읽고 과거를 되짚는 액자식 구성이 작품에 여운을 더하는 로맨스의 고전이다.

© 2026 Focus Features LLC
© Warner Bros. Discovery, Inc.

원 데이

무심코 지나쳤던 하루는 훗날 평생 잊지 못할 하루가 된다. 대학교 졸업식날인 7월 15일에 친구로서 처음 만난 엠마(앤 해서웨이)와 덱스터(짐 스터지스). 수년간의 엇갈림 끝에 마침내 서로에게 닿지만 행복도 잠시, 운명은 두 사람에게서 그 시간을 앗아간다. 영화는 매년 두 사람에게 상징적인 한 날짜만을 보여주는 독특한 구성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인연의 소중함을 뭉클하게 담아낸다.

미 비포 유

성공한 금융인으로 익스트림스포츠를 즐기며 살던 윌(샘 클라플린)은 사고로 전신마비 환자가 된다. 그는 삶의 의지를 잃고 지내다 밝은 에너지를 가진 임시 간병인 루이자(에밀리아 클라크)를 만나며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고, 두 사람은 점차 서로의 세계를 바꿔나간다. 사랑이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묻는 영화로, 윌의 결정은 익숙한 로맨스 공식을 벗어난다.


#화제의_한국_영화

© SHOWBOX
© 네이버영화

왕과 사는 남자

어린 나이에 폐위된 조선 제6대 왕 단종(박지훈)과 그가 유배된 산골 마을에서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촌장 엄흥도(유해진)의 이야기를 그린 사극. 역사의 빈틈에 남겨진 인물을 따뜻한 상상력으로 되살리며, 유배지에서 피어난 두 사람의 인간적 유대와 연민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비극적인 결말 속에서도 깊은 울림을 전하는 휴먼드라마로 개봉 후 한 달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부산행

일밖에 모르는 펀드매니저 석우(공유)는 별거 중인 아내를 만나기 위해 딸 수안(김수안)과 부산행 열차에 오른다. 그런데 갑자기 정체불명의 감염 사태가 벌어지고, 승객들은 생존을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한국 좀비영화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보여준 한국형 좀비 블록버스터의 대표작.

© 네이버영화

공조

비밀리에 제작된 위조지폐 동판을 탈취한 동료의 배신으로 아내를 잃은 북한 특수 형사 림철령(현빈)은 복수심을 품고 서울로 향한다. 남한의 생계형 형사 강진태(유해진)는 그를 돕는 동시에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으며 뜻밖의 공조를 시작한다. 서로를 경계하는 두 사람의 호흡이 웃음을 자아내는 한편, 속도감 있는 액션이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상상_속_그림체

© 2026 Disney Enterprises, Inc.

호퍼스

동물을 지키려면 동물이 돼야 한다? 자연을 사랑하는 대학생 메이블은 고속도로 건설로 서식지를 잃을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지키기 위해 비밀 프로젝트에 뛰어든다. 인간의 의식을 동물 로봇으로 옮겨 원격조종하는 첨단기술로 비버 로봇에 자신의 의식을 옮긴 메이블은 동물 세계에 잠입해 모험을 펼친다. 디즈니·픽사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으로, 동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참신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 2026 Universal Studios
© 2017 Disney Enterprises, Inc.

마이펫의 이중생활 2

반려견 맥스와 듀크는 주인 케이티와 함께 시골 농장으로 떠난다. 이번에는 케이티의 남편과 어린 아들 리암도 같이한다. 새로운 가족이 생긴 맥스는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전작보다 더욱 다채로워진 캐릭터들은 각자의 모험을 시작한다. 반려동물들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과 속마음을 따뜻하게 그려낸 애니메이션.

코코

음악을 사랑하지만 대대로 음악을 금기시하는 집안에서 자란 소년 미겔. 전설적 가수의 유품인 기타를 손에 넣으며 우연히 죽은 자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그는 의문의 헥토르와 함께 가족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나선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비는 멕시코의 축제 ‘죽은 자들의 날’이 영화의 배경이 되어 화려한 영상미를 더한다.

  • 탑승하시는 항공편에 따라 제공되는 콘텐츠가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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